갤러리R(gallery R)
서울특별시 성동구 광나루로 294 성동세무타워 B01호
TEL 02-6495-0001
e-mail galleryrkr@gmail.com
2023년 9월 9일 - 10월 14일
작가와의 대화 : 2023년 9월 9일(토) 오후 3시
전시오픈 : 매주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오픈시간 : 오후 1시부터 7시까지
전시휴관 : 매주 일요일, 월요일
김을은 1981년 원광대학교 금속공예과를 졸업하고, 1989년 홍익대학교 산업미술대학원을 졸업했다. 1994년 금호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개최한 그는 다수의 개인전과 그룹전에 초대받았다.
김을은 국립현대미술관과 경기도미술관 그리고 OCI미술관 등 국내의 미술관과 갤러리뿐만 아니라 독일 퀠른의 쿤스트라움(KUNSTRAUME),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베이스 프로젝트(Le Basse Projects)와 앤듀류셔 갤러리(Andrewshire Gallery) 그리고 백아트(Baik Art), 중국 베이징의 팍스 아트 아시아(Pax Arts Asia), 일본 도쿄 o 미술관 등 해외 미술관과 갤러리에 초대되었다.
김을은 2016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올해의 작가상 2016>과 2018년 ‘이중섭미술상’을 수상했다. 그는 중국 베이징 PSB 레지던시, 경기창작센터, 경주 국제레지던시의 입주작가였다.
김을은 <김을 드로잉 2002-2004(KIM EULL DRAWINGS 2002-2004)>(Gallery FISH. 2004), <김을 드로잉 파이50>(2005), <드로잉 : 계단(Drawing ; Stair)>(접는 미술관. 2006), <김을 드로잉북(The Kim eull drawing book)>(Gallery Ssamzie. 2006), <미쎌레이니어스 드로잉(Miscellaneous Drawings)>(Arko Art Center. 2006), <김을 드로잉>(2007), <마이 그레이트 드로잉(MY GREAT DRAWINGS)>(2011) 등 총 7권의 드로잉북도 출간했다.
***
이민정은 2004년 파리-세르지 국립고등미술학교를 졸업(DNAP, DNSEP)하고 대한민국으로 귀국해 2007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전문사 조형예술과를 졸업한다. 그녀는 2020년 영은미술관의 창작스튜디오에서 작업하고, 현재는 성남의 개인 스튜디오에서 작업하고 있다.
2005년 이민정은 가 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개최한 후 LIG 아트홀, 신한갤러리, 플레이스 막, 아다마스253갤러리, 175갤러리, 영은미술관, 도로시 살롱 등에서 개인전을 개최한다. 그녀는 2003년 프랑스의 몽루즈 살롱전(Salon de Montrouge)을 시작으로 다양한 그룹전에 참여한다. 그녀의 대표적인 그룹전은 다음과 같다.
2004년 『시사회』(대안공간 팀프리뷰), 2005년 『우수청년작가』(갤러리가이아), 2007년 『막긋기』(소마미술관)와 『Double Take』(프랑스 Paris Beaux-arts), 2008년 『현혹되고 그려지는』(서미앤투스 갤러리)과 『Young Collector's Choice』(굿모닝 신한증권 본사), 2010년 『뙁따먹기』(갤러리 몽스트르)와 『형식을 넘어선 태도』(닥터박 갤러리), 2012년 『drawing party』(인더스트리얼 카바레)와 『사루비아 기금마련』(이화익 갤러리), 2013년 『가까운 미래, 먼 위로』(갤러리 화이트 블록)와 『차이의 공간(갤러리 조선), 2014년 『다른 모습(DGB갤러리)과 『작가 100명의 한글티셔츠』(DDP), 2019년 『이것을 보는 사람도 그것을 생각한다』(아트 스페이스3), 2022년 『물질구름』(아트 스페이스3), 2023 『슬로우 슬로우 퀵 퀵』(갤러리 R) 등이 있다.
***
나는 김을 선생님과 이민정 작가에게 갤러리 R의 2인전 타이틀을 제안했다. 이민정 작가는 김을 & 이민정 2인전 타이틀로 <슬로우 슬로우 퀵 퀵(Slow slow quick quick)>과 <이런저런 의미가 아니고>를 제안해 주었다. 김을 쌤과 나는 이민정 작가가 제안한 두 개의 전시타이틀을 모두 맘에 들었다.
김을 쌤과 이민정 작가는 나에게 2인전 타이틀 결정권을 주었다. 나는 <슬로우 슬로우 퀵 퀵>을 2인전 타이틀로 결정했다. 그리고 나는 갤러리 R의 김을 & 이민정 2인전과 함께 발행될 이민정 작가의 전자도록 제목으로 <이런저런 의미가 아니고>를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슬로우(slow)’는 일반적으로 4분의 4박자 음악에서 2비트의 타이밍을 일컫는다. 반대로 ‘퀵(quick)’은 일반적으로 4분의 4박자 음악에서 1비트의 타이밍을 일컫는다. 따라서 ‘슬로우’는 ‘느리게’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반면, ‘퀵’은 ‘빠르게’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는 우리에게 ‘퀵’만을 강요한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퀵’만 혹은 ‘슬로우’로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이를테면 변화무쌍한 우리의 인생은 슬로우와 퀵으로 점철되어 있다고 말이다. 따라서 혹자는 인간이 만들어낸 ‘슬로우 슬로우 퀵 퀵’을 본능적인 리듬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인간의 본능적인 리듬인 ‘슬로우 슬로우 퀵 퀵’은 아티스트들의 작업에도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말하자면 아티스트는 작품제작을 ‘슬로루~ 슬로우~’하게만 할 수도 없고, ‘퀵! 퀵!’으로만 할 수도 없다고 말이다. 따라서 아티스트는 슬로우와 퀵을 조화롭게 운용하여 깊은 사유를 담은 작품을 제작한다.
갤러리 R은 한발 늦더라도, 한 번 더 생각해서, 관객 여러분들에게 짧고 굵은 기획전 『슬로우 슬로우 퀵 퀵』을 소개해드리고자 한다. 턱시도를 착용한 김을 쌤의 작품들과 우아한 드레스를 입은 이민정 작가의 작품들은 ‘클로즈드 포지션(closed position)’을 유지하며 우아하면서 강렬한 ‘춤’을 추게 될 것이다.
***
김을의 ‘나쁜 드로잉(bad drawing)’
김을은 이번 갤러리 R에 드로잉 14점과 ‘비욘드 더 페인팅(Beyond the Painting)’ 1점 그리고 앗상블라주(assemblage) 17점을 전시한다. 김을은 드로잉을 “붓과 연필이 아닌 망치로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드로잉을 ‘나쁜 드로잉(bad drawing)’이라고 부른다. 왜 그는 자신의 드로잉을 ‘망치’로 작업하는 ‘나쁜 드로잉’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김을_무제. 2023, 혼합재료, 16x11x1cm
김을의 ‘나쁜 드로잉’ 한 점을 그 사례로 들어보자. 그의 <무제>(2023)는 작은 캔버스(가로 7cm, 세로 10cm)에 물감으로 그린 그림을 액자에 넣은 작품이다. 작은 그림 왼쪽 위에는 미니어처 사슴이 서 있고, 그림 오른쪽 밑에는 캔버스 천의 가냘픈 실타래가 서 있다. 그런데 실타래의 상반신이 붉은색으로 채색되어 있어 마치 사람 형상처럼 보인다.
이런 단편적인 정보는 김을의 ‘드로잉’은 전통적인 드로잉으로 포착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의 드로잉은 전통적인 드로잉에 딴지 걸고, 훼방 놓고, 더럽히고, 해체 시킨다. 왜 그가 자신의 드로잉을 연필이나 붓이 아닌 ‘망치’로 하는 것이라고 말했는지 이해하시겠죠? 왜 그가 자신의 드로잉을 ‘나쁜 드로잉’이라고 부르는지 감 잡으셨죠?
물론 전통적인 드로잉을 해체한 김을의 ‘나쁜 드로잉’은 개념화할 수 없다. 이를테면 ‘드로잉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비트겐슈타인(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의 목소리를 빌리자면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드로잉의 존재론에 관한 질문에 어떠한 답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을은 ‘나쁜 드로잉’을 통해 드로잉의 존재론에 대해 말하는 것이 헛소리라는 걸 입증할/보여줄 뿐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 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1922)의 마지막 문장에서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Wovon man nicht sprechen kann, daruber muss man schweigen.)”고 말한다. 그렇다면 말할 수 없는 지점에서 드로잉은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말하자면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시를 쓰거나 작곡을 하거나 글을 쓰거나 드로잉을 하게 된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드로잉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보여주는 예술이 아닌가?
김을의 ‘회화를 넘어서(Beyond the Painting)’
자, 이번에는 김을의 <비욘드 더 페인팅(Beyond the Painting)>(2021)을 보도록 하자. 그것은 캔버스에 플라스틱 비행기의 ‘머리’를 박아놓은 것이다. 머시라? 작가는 장난감 비행기 ‘머리’ 부분을 절단하여 캔버스에 접목한 것 같다고요? 만약 캔버스에 비스듬하게 박힌 비행기 길이가 17cm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캔버스에 박힌 비행기 머리 부분은 7cm 정도 될 것으로 추정할 수 있겠다. 그런데 캔버스 두께가 무려 12cm에 달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김을이 장난감 비행기의 머리 부분을 절단하지 않고 통째로 캔버스에 박아놓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을은 어느 인터뷰에서 ‘비욘드 더 페인팅’의 출발을 “회화의 표면에 대한 불신과 회의에서 시작되었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그의 ‘비욘드 더 페인팅’ 시리즈가 다름아닌 ‘회화의 표면에 대한 불신과 회의’에 대한 일종의 ‘답변’이란 말인가? 그의 ‘비욘드 더 페인팅’은 12cm의 두께를 지닌 캔버스라는 것 그리고 오브제를 접목한 것이란 점에서, 그것은 회화이면서 조각이고 동시에 회화도 아니고 조각도 아닌 셈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전통적인 미술의 장르인 2차원적 회화/3차원적 조각이라는 이분법을 해체하는 것이 아닌가? 그는 ‘비욘드 더 페인팅’ 시리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김을_Beyond the painting_캔버스에 플라스틱 비행기_119x93x12cm. 2021
“저의 ‘비욘드 더 페인팅(Beyond the painting)’ 시리즈는 물리적 구조로서 회화표면의 뒤에 검은 공간이 조성되어 있고 이 앞뒤의 두 공간은 ‘창문’이라는 통로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표면의 무의미한 공간을 지나 그 너머의 어두운 침묵 속의 상상의 공간 속에서 표면에서 생략된 진실의 세계를 유추, 상상해 보는 사색적이고 자유로운 미적 세계를 탐색하게 됩니다. 이때, 감상자는 수동태에서 벗어나 능동적 자세로 그림을 접하게 됩니다.”
만약 당신이 김을의 ‘비욘드 더 페인팅’ 시리즈를 모두 조회해 본다면, 10cm의 캔버스 두께 안에 다양한 이미지/오브제들을 담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그의 ‘비욘드 더 페인팅’ 시리즈는 현실과 가상의 혼합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그의 ‘비욘드 더 페인팅’ 시리즈는 리얼리티를 허구 속으로 스며들게 하고, 허구가 리얼리티 속에 정착되게 다양한 작품들을 연출해 놓은 작품이 아닌가?.
김을의 ‘아티스트 태도’
김을의 ‘비욘드 더 페인팅’ 시리즈는 가상(회화)과 현실을 접목한 일종의 ‘초현실 세계’로 보인다. 그는 ‘초현실 세계’를 ‘트와일라잇 존(Twilight Zone)’이라고 부른다. 김을은 이번 갤러리 R 2인전에 ‘트와일라잇 존 스튜디오(twilight zone studio)’를 일종의 ‘미니어처’로 제작한 앗상블라주 작품들도 전시한다.
나는 이곳에서 김을의 <회사후소(繪事後素)>(2023)와 <해의반박(解衣槃礴)>(2023)만 간략하게 살펴보겠다. 그의 <회사후소>는 ‘트와일라잇 존 스튜디오’에 붓을 손에 잡고 있는 남자가 빈 캔버스를 바라보는 있는 상황을 미니어처로 제작한 앗상블라주 작품이다. 작업실 벽면에는 종이에 붓으로 쓴 ‘繪事後素’와 ‘망치’가 걸려있다. 그렇다면 그의 <회사후소>는 우리가 흔히 이해하는 ‘회사후소’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을 ‘망치’로 해체시한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란 말인가?
김을_회사후소(繪事後素)_혼합재료_18x14x14cm. 2023
‘회사후소’는 흔히 ‘그림 그리는 일은 하얀 바탕칠을 하고 난 뒤에 한다’고 해석한다. 그런데 동양의 그림은 600년 전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캔버스’ 위에 그려진 것이 아닌 기원전부터 양면이 사용 가능한 ‘화선지’에 그려졌다. 따라서 ‘회사후소’를 하얀 바탕칠을 하고 난 후에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해석은 오늘날의 통념적 이해에서 근거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회사후소’는 어떻게 해석되어야 할까?
일단 ‘회사후소’가 등장하는 『논어(論語)』를 인용해 보자. 자하가 스승 공자에게 물었다. “스승님, ‘묘한 웃음 아름답고, 아름다운 눈 맑기도 한데, 바탕으로서 더욱 빛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요?” 공자 왈, “회사후소.” 이에 자하가 “예(禮)는 나중입니까?”라고 물었다. 공자 왈, “나를 일으키는 자는 그대로다. 비로소 함께 시(詩)를 말할 수 있게 되었구나.”
위 인용문은 위나라 장공의 부인 장강의 아름다운 모습에 관한 공자와 제자 간의 일화다. 공자의 ‘회사후소’는 장강의 아름다운 외모가 ‘바탕’으로 더욱 빛난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바탕’은 일종의 ‘마음(본성)’을 뜻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면 김을은 관객에게 ‘회사후소’를 ‘그림 그리는 일은 바탕을 깨달은 뒤에 할 수 있다’고 표현해 놓은 것이란 말인가?
김을_해의반박(解衣槃礴)_혼합재료_14x17x18cm. 2023
김을의 <해의반박>은 ‘트와일라잇 존 스튜디오’에 붓이 아닌 ‘빗자루’를 손에 든 남자가 상의를 풀어 해치고 바닥에 앉아 빈 캔버스를 바라보는 있는 상황을 미니어처로 제작한 앗상블라주 작품이다. 작업실 기둥에는 종이에 붓으로 쓴 ‘解衣槃礴’이 부착되어 있고, 작업실 바닥에는 붉은 물감이 담긴 그릇과 장난감 돼지 한 마리를 연출해 놓았다.
‘해의 반박’은 『장자(莊子)』의 외편인 「전자방(田子方)」에서 언급된 일화이다. 그림을 좋아한 송나라의 원군(元君)이 화가들을 불러모아 그림을 그리게 한다. 화가들은 원군의 명을 받고 붓에 침을 바르고 먹을 가는데, 뒤늦게 도착한 한 화가는 그림 그릴 준비를 하지 않고 숙소로 들어갔다. 원군이 사람을 시켜 그를 살펴보게 했더니, 그는 ‘옷을 풀어 해치고 두 다리를 뻗은 채로 앉아 있었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원군은 “옳다. 이 사람이야말로 참된 화가이다”라고 말했다.
김을_무제_혼합재료_4x9x17cm. 2022
김을의 <해의반박>은 장자의 일화를 극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는 화가에게 ‘붓’ 대신 ‘빗자루’를 들게 하고, 작업실에 돼지까지 캐스팅해 놓았다. 그렇다면 그의 <해의반박>은 기존의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아티스트의 태도’를 표현한 것이 아닌가? 김을은 이번 갤러리 R의 2인전에 ‘아티스트의 태도’와 관련된 또 다른 작품도 전시한다. 그것은 황량한 사막에서 자신의 작품들을 끌고 가는 모습을 표현한 작품이다. 뭬야? 김을은 ‘아티스트란 자신의 작품을 죽을 때까지 짊어져야만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고요?
이민정의 ‘기괴한 드로잉’
이민정은 이번 갤러리 R에 드로잉 9점과 회화 34점을 전시한다. 만약 당신이 갤러리 R로 들어서면 그려의 드로잉 9점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녀의 드로잉 맞은편에는 12점으로 이루어진 그녀의 <무제(untitled)>(2023)가 설치되어 있다. 그 12점은 한결같이 회색 톤으로 알쏭달쏭한 이미지들을 마치 드로잉 하듯 그린 회화이다. 그녀의 <무제> 옆에는 마치 울타리처럼 보이는 이미지들을 그린 그림 7점이 전시되어 있고, 다음 벽면에는 묘한 이미지들을 그린 100호 4점을 전시해 놓았다. 100호 4점 맞은편에는 크기가 다양한 캔버스에 그린 그림 11점이 연출되어 있다.
이민정_드로잉들. 2023
이민정의 드로잉과 회화는 흔히 ‘추상화’로 간주한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추상화는 실재하는 객관적이고 물적인 대상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비구상적이고 반사실주의적 경향의 미술을 뜻한다. 그런데 이번 갤러리 R에 전시된 그녀의 드로잉에는 특정한 이미지들이 등장한다. 그녀의 <무제(untitled)>(2023)는 종이에 연필로 인물을 그린 것이다. 그것은 인물이 붓을 손이 아니라 입에 물고 그림을 그리고 있는 드로잉이다. 그녀의 <손(hand)>(2023)은 제목 그대로 손을 종이에 수채화 물감으로 그린 것이고, 그녀의 <발(foot)>(2023)은 제목 그대로 집을 종이에 수채화 물감으로 그린 것이며, 그녀의 <집(house)>(2023)은 제목 그대로 집을 종이에 수채화 물감으로 그린 것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이민정의 드로잉은 제목 그대로 보이지는 않는다. 말하자면 그녀의 <손>은 우리가 알고 있는 손 모양은 아니라고 말이다. 우리가 손을 연상하는 것은 다름아닌 푸른색 물감으로 그려진 다섯 개의 손가락 때문이다. 하지만 다섯 개의 손가락 외에 그려진 붉은 선들은 도통 무엇을 표현한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리고 그녀의 <집>은 집의 형태에 기괴한 이미지도 그려져 있다. 지붕에 그려진 두 원과 묘한 곡선은 마치 사람의 눈과 코를 연상케 한다. 또한 그녀의 <발>은 마치 동물의 뼈처럼 기괴하게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발’이라는 제목을 통해 그것이 발을 쭉 펴서 발바닥을 그린 것을 상상하게 한다.
물론 이민정의 드로잉들 중에 실재하는 객관적이고 물적인 대상을 재현하지 않은 작품들도 있다. 캔버스 보드(canvas board)에 유화물감으로 마치 대기의 바람을 표현한 것처럼 보이는 배경에 3개의 선을 그린 그녀의 <무제(untitled)>(2023)와 판넬(panel)에 유화물감으로 마치 하늘과 땅을 그린 것처럼 보이는 배경에 알쏭달쏭한 두 개의 이미지를 그린 그녀의 <무제(untitled)>(2023)가 그것이다. 물론 3개의 선은 나에게 대기의 바람을 단순하게 표현한 것으로 보이고, 두 개의 이미지는 나에게 비정형의 구름을 연상케 한다.
이민정의 ‘회화세계’를 찾아서
자, 이번에는 이민정의 회화를 보도록 하자. 나는 지나가면서 마치 울타리처럼 보이는 이미지들을 그린 그림 7점이 전시되어 있다고 중얼거렸다. 물론 7점 모두 울타리를 연상케 하지는 않는다. 그 7점 중에서 울타리를 연상케 하는 그림은 그녀의 <블루 디펜스(blue defence)>(2023) 한 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이곳에서 7점 중 ‘울타리’를 연상케 하는 3점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이민정_blue defence_oil on canvas_65.1x53cm. 2023
이민정의 <블루 디펜스>는 캔버스에 유화물감으로 비정형적인 바람과 구름을 그린 후 푸른색 울타리(fence)를 그린 것이다. 그녀는 푸른 울타리를 ‘푸른 방어물’로 적었다. 그런데 ‘푸른 방어물’은 허술해 보인다. 왜냐하면 울타리들 사이에 빗장이 없는 곳들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의 ‘방어물’은 형식적이란 점을 알려준다. 왜 그녀는 ‘형식적인’ 방어물을 그린 것일까? 뭬야? 그녀가 당신을 빗장이 풀린 곳으로 초대하고 있는 것 같다고요?
이민정_흐린 날. 2023, oil on canvas_60.6x50cm. 2023
이민정의 <흐린 날(a cloudy day)>(2023)은 제목 그대로 마치 흐린 날의 풍경을 그린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흐린 날의 풍경에 그녀의 <블루 디펜스>에서 보았던 울타리 형상이 나타난다. 그런데 수직의 울타리 형상은 수평의 형상을 만나 ‘교회’ 건축물을 연상케 한다. 그런데 ‘교회’는 곧 몰아칠 폭풍에도 흔들리지 않을 듯 견고하게 지어져(그려져) 있다. 따라서 그것은 곧 폭풍이 몰아칠 것 같은 상황에 대비한 ‘방어물’이라기보다 차라리 ‘피난처’라고 말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머시라? 그것은 내면을 그린 것이란 점에서 ‘마음의 안식처’로 보인다고요?
이민정_memories of travel_oil on canvas_60.6x50cm. 2023
이민정의 <여행의 기억(memories of travel)>(2023)은 마치 아치(arch)가 있는 건축물을 연상케 하는 그림이다. 크기가 서로 다른 3개의 아치는 컬러도 각기 다르다. 머시라? 작가는 유럽 여행에서 건축물의 아치를 본 추억을 떠올려 그린 그림으로 보인다고요? 흥미롭게도 이민정은 3개의 아치 옆에 상대적으로 크기가 작은 수직의 직사각형 형태를 그려 놓았다. 따라서 곡선의 아치가 직각의 직사각형보다 압도하는 것으로 느껴지게 한다. 그렇다면 그녀는 곡선의 아치를 강조하기 위해 직사각형을 그린 것이란 말인가?
그런데 ‘아치’는 흥미롭게도 나에게 ‘울타리’를 연상시킨다. 그렇다면 그녀가 ‘울타리’를 허술하게 그린 이유가 ‘방어’가 아닌 ‘문’을 암시하는 것이란 말인가? 이런 단편적인 정보는 이민정의 회화가 하나의 스타일을 유지(stay in style)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녀의 그림들에는 자유분방하게 그린 배경과 기하학적인 형태가 ‘동거’한다. 이를테면 그녀의 회화에는 이질적인 이미지들이 동거한다고 말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자유분방한 배경이 자연의 풍경을 상상케 한다면, 기하학적 형태는 건축물의 공간을 연상케 한다.
이민정의 ‘미스터리_페인팅(mystery_painting)’
자, 이번에는 100호 캔버스에 그린 이민정의 대작들을 보도록 하자. 지나가면서 나는 그 100호 4점을 묘한 이미지들을 그린 그림으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대작들은 나에게 일종의 ‘미스터리_페인팅(mystery_painting)’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그녀의 회화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비밀이나 신비 그리고 수수께끼나 불가사의한 작품이라고 말이다. 따라서 그녀의 작품이 불가해한 이미지를 그린 그림이라면, 나는 그림의 신비로운 수수께끼를 해석하는 입장에 놓여 있다. 하지만 나의 미션은 임파셔블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난 이민정의 혼란스럽고 난해한 회화세계로 들어선다. 그녀의 그림에는 적잖은 레이어(layer)가 있다. 난 그녀의 그림에 표현된 레이어들을 한 겹씩 벗겨보고자 했지만 매번 난공불락에 빠진다. 그래서 난 그녀에게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 대해 물었다. 그녀는 톡으로 나에게 사진 몇 장을 보내주었다. 그것은 그의 대작 중 한 점인 <남겨진 것들(The things left behind)>(2023)을 제작하던 과정에 찍은 9장 사진이다.
나는 이곳에서 9장의 사진을 간략하게나마 보도록 하겠다. 1은 상/하로 두 가지 색으로 모호한 풍경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그것은 마치 우거진 숲의 풍경이 강에 비친 모습으로 보인다고 말이다. 2는 상단에 사각의 틀을 그려 놓았다. 3은 상/하를 거꾸로 뒤집어 2를 지우기/그리기 한 것이다. 특히 사각의 틀은 수평선(막대)만 남겨져 있다. 4는 3을 지우기/그리기 한 것이다. 특히 화면 중간에 다양한 컬러로 그려진 모자이크(mosaic) 형태가 두드러지게 보인다.
5는 어수선한 풍경을 마치 정리하듯 회색으로 지우기/그리기 놓았다. 특히 모자이크 중에 파란색 사각형을 다른 사각형들보다 크게 그렸다. 그리고 사각의 틀에서 남겨진 수평 막대마저 덮었다. 6은 화면에서 두드러지게 그려진 모자이크를 미비한 흔적만 남을 정도로 덧칠해 놓았다. 그리고 그림 상/하를 구분 짓는 수평선을 그렸다. 7은 수평선을 기점으로 거대한 회색 톤의 사각형을 그려 놓았다. 덧붙여 거대한 사각형의 오른쪽 수직 선상에 묘한 4개의 형태를 마치 줄줄이 사탕처럼 표현해 놓았다.
8은 거대한 회색 톤의 사각형과 묘한 4개의 형태마저도 덧칠해 지웠다. 그리고 화면 중앙에 회색으로 마치 건축적 공간처럼 보이는 기하학적인 형태와 하단에 비정형의 형태를 함께 표현해 놓았다. 9는 정성스럽게 그린 기하학적인 형태와 비정형의 형태를 지워버렸다. 아니다! 하단에 그려진 기하학적인 형태와 비정형의 형태 일부는 남겨두었다. 그녀는 화면 상단에 수직의 형태들을 그려 놓았다. 말하자면 왼쪽에는 아치 형태들을 그리고 오른쪽에는 마치 산처럼 보이는 형태들 말이다.
그런데 화면 왼쪽 회색과 흰색 아치 옆에 그려진 형태는 오른쪽에 그려진 마치 산처럼 보이는 형태에서 반만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마치 인간처럼 보인다(기보다 차라리 ‘유령’처럼 느껴진다). 그렇다면 인간/유령이 아치문으로 들어서는 것이란 말인가? 하지만 그 인간/유령은 아치문보다 크기가 크다. 그러고 보니 하단에 그려진 기하학적인 형태와 비정형의 형태 일부가 마치 사람이 어느 공간으로 들어서는 모습처럼 느껴진다.
이런 단편적인 읽음은 이민정의 <남겨진 것들>이 모호한 이미지에서 점차 구체적인 형상으로 표현한 것임을 알려준다. 그녀는 캔버스에 우선 이성이나 의식에 지배되지 않고 무의식 가운데에 화필을 자유롭게 움직여서 그림을 그린다. 하지만 그녀는 특정한 의식이나 의도 없이 무의식의 세계에서 발현되는 이미지를 그대로 표현하는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법(Automatism)에 만족하지 않는다.
이민정은 손이 움직이는 대로 그린 그림을 보고 몇 차례 지우기/그리기를 반복한다. 이를테면 그녀는 그림과 밀당한다고 말이다. 따라서 1에서 9에 이르는 이민정의 <남겨진 것들>은 그녀와 그림 사이에 벌어지는 미묘한 심리 싸움을 통해 남겨진 흔적인 셈이다. 따라서 그녀의 그림은 몽롱하고 마치 꿈을 꾸는 듯한 인상을 준다. 물론 나는 이민정의 꿈에 초대받을 수 없지만, 나는 그녀의 그림에 들어설 수는 있다.
나는 이민정의 <남겨진 것들>을 보면서 문득 스티븐 킹(Stephen King)의 단편소설 <그들이 남긴 것들(The things left behind)>이 떠오른다. 킹의 소설은 9.11사태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소지품이 생존자의 집에 계속해서 나타난다는 이야기이다. 머시라? 혹 그녀의 <남겨진 것들>이 스티븐 킹의 단편소설 <그들이 남긴 것들>을 재현한 것이냐고요? 아니다! 그것은 지나가면서 중얼거렸듯이 주제 없이 그려진 그림과 밀당하다가 그려진 그림이다.
그런데 이민정은 그림과 밀당해 그려진 그림을 보면서 스티븐 킹의 단편소설 <그들이 남긴 것들>을 떠올렸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녀는 <그들이 남긴 것들>이 아닌 그녀와 그림이 <남긴 것들>이라고 작명한 것이 아닐까? 그러면 혼란스럽고 난해한 그녀의 그림은 사건을 통해 이미지를 표현한 것이 아니라 차라리 이미지를 통해 사건에 닿은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