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정 & 홍명섭
space TEMI
대전광역시 중구 테미로 44번길 40
TEL 010-8405-1141
e-mail click3210@naver.com
2023년 6월 10일(토) - 7월 9일(일)
전시오픈 : 매주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오픈시간 : 오후 12시부터 6시까지
전시휴관 : 매주 월요일 일요일
공동기획 : space TEMI 김주태 큐레이터 & gallery R 류병학 객원큐레이터
스페이스 테미(space TEMI) 김주태 큐레이터입니다. 대전 중구 테미로에 위치한 스페이스 테미(대표 최경아)는 오는 6월 10일부터 7월 19일까지 대전출신 작가들인 현지정 작가와 홍명섭 작가의 2인전 『리빙 네스트 도어 메타-아티스트(LIVING NEXT DOOR TO META-ARTISTS)』를 개최합니다.
* 현지정 작가(1982년생)는 대전 출생으로 서울예대에서 국악과와 서울예대 영화연출학과를 졸업했습니다. 이후 그녀는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유럽 고등이미지 학교(L’Ecole europeenne superieure de l’image)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고 졸업했습니다.
현지정 작가는 2017년과 2018년 두 번의 레지던시(FOND REGIONAL D’ART CONTEMPORAIN, CENTRE INTERNATIONAL CAPRIN A LINAZAY)를 하고 결과 보고전을 개최합니다. 그녀는 2019년 앙굴렘의 퍼포먼스 페스티벌(PLAYGRU)에서 퍼포먼스를 선보입니다. 그녀는 판데믹으로 2021년 대한민국으로 귀국하여 고향인 대전에서 작업하고 있습니다.
* 홍명섭 작가(1948년생)는 평양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에서 조소 전공으로 학사, 석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그는 1990년 제44회 베니스비엔날레에 초대받으면서 국내외 미술계에 주목을 받았습니다.
홍명섭 작가는 1978년 대전 문화원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개최했습니다. 이후 그는 슈테델릭 즈볼레 시립미술관(네델란드), 노비 사드 문화예술회관(세르비아), 데사우(독일), 반화랑(오사카 일본), 선재미술관(경주), OCI미술관, 가인화랑, UM갤러리 등에서 다수의 개인전을 개최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양한 국내외 기획전에 초대받았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그룹전은 다음과 같습니다.
1995년 46회 베니스 비엔날레 기획전 ASIANA, 독일 슈투트가르트 펠바하 ‘95국제소형조각 트리엔날레, 폴란드 바르샤바의 아르스 폴로나 갤러리 2인전, 국립현대미술관 기획전(‘95 한국현대미술: 질, 양, 감), 1997년 독일 퀠른 ’Pair‘, 독일 드레벤 ’국제 쿤스트 포름‘, ‘97 광주비엔날레 특별전, 2000년 미디어 시티-서울, 부산 국제 아트페스티발(picaf), 2003년 이탈리아 사보나 비엔날레(biennale of ceramics in contemporary art), 2005년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 2006년 스위스 빌 국제전(Fluid Artcanal International), 2007년 독일 대사우 ’rainbow mapping project‘, 2008년 부산비엔날레, 오스트리아 그라츠 ESC갤러리, 2009년 인천 국제 디지털아트페스티벌, 2012년 오스트리아 그라츠 Kunstbad ’FLOW‘, 세르비아 노비사드문화예술센터, 2016년 부산비엔날레 등이 그것입니다.
홍명섭은 한성대학교 예술대학 교수 그리고 청주시립미술관 관장으로 재직했으며, 미술비평가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는 작가에 대한 다수의 비평문과 연구 논문 그리고 에세이 또한 단행본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의 저서로는 『전환기의 현대미술』(솔출판사, 1991), 『미술과 비평사이』(솔출판사, 1995), 『현대미술의 기초개념』(강성원 편집, 엔소로지, 1995), 『현대철학의 예술적 사용』(아트북스, 2017) 등이 있습니다.
홍명섭의 작품은 서울시립미술관, 경기도미술관, 포항시립미술관, 아르코미술관, 대전시립미술관, 청주시립미술관 등 국공립미술관과 사립미술관인 호암미술관 그리고 개인 컬렉터들이 소장하고 있습니다.
LIVING NEXT DOOR TO META-ARTISTS!?
머시라? 당신은 현지정 & 홍명섭 2인전 『리빙 네스트 도어 메타-아티스트』라는 전시타이틀을 보면서 영국의 4인조 락 밴드인 스모키(Smokie)의 대표곡인 <옆집 사는 앨리스(Living Next Door To Alice)>(1976)를 떠올렸다고요? 현지정 작가는 홍명섭 작가를 ’옆집 아저씨‘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그녀의 집은 문자 그대로 홍명섭 작가의 집 옆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홍명섭 작가는 현지정 작가에게 한 마디로 ’옆집 아저씨‘였던 것이다. 당시 현지정은 ’옆집 아저씨가 작가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어떤 작가인지는 대학에 들어가서야 알게 되었단다. 20대 초반 현 작가는 “대학로에 위치한 마로니에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던 전시를 방문했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시 마로니에미술관에서는 홍명섭 선생님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었어요. 저는 ‘옆집 아저씨’가 1990년 대한민국 대표로 베니스비엔날레에 참가한 유명한 작가고 한성대학교 예술대학 회화과 교수라는 것을 그때 알게 되었지요”
뭬야? 자기는 현지정 & 홍명섭 2인전 『리빙 네스트 도어 메타-아티스트』라는 전시타이틀을 보면서 가상세계(동화)와 현실세계의 구분이 해체된 ’앨리스가 옆집에 산다’는 뜻으로 상식과 통념을 뒤집는 발상의 전환과 일탈의 묘미를 추구하는 집단을 말하는 ‘넥스트-도어 앨리스(Next_Door Alice)’를 떠올렸다고요?
그렇다! 현지정 & 홍명섭의 작품들은 일명 ‘넥스트-도어 앨리스’라고 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당신이 스페이스 테미에 전시된 현지정 & 홍명섭의 작품들을 보게 된다면, 그들의 작품이 상식과 통념을 뒤집는 발상의 전환과 일탈의 묘미를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홍명섭의 설치작품 <땅바닥 굴곡 측정기>(2023)
“Level casting ; 수평에의 의지”, 1978-2023.
‘the will to be horizontal’ 시리즈
ground casting, 땅바닥 굴곡 측정기 ; color spring / space TEMI, 2023
물은 언제나 수평을 찾아 흐른다. 물이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수평을 이루고자 하는 의지일 것이다. 폭포는 수평에의 의지를 가장 강력히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저 거대한 호수의 수평면을 만들어내는 중력(수평 의지)을 어떻게 하면 하나의 일시적 표면 현장 그대로 포획할 수는 없을까? 또는, 무한한 대지 표면의 장력을 어떻게 하면 하나의 프랙탈 같은 부분 현장으로라도 제시할 수는 없을까?
내 작업을 지탱케 하는 정황은, 어떠한 매개도 없이 수평을 감각으로 사유하기를 통해 아상의 반영을 최소화하려는 과정이다.
(가만 보면) 한겨울 호수가 얼어붙으면 그 표면의 매끄러운 얼음판이야말로 곧 수평면을 스스로 캐스팅해내는 형국이 아닌가. 또한, 끝없이 펼쳐지는 레일로드는 광활한 대지의 표면을 캐스팅해내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는 것 아닌가.
광활한 호수의 빙판을 칸칸이 잘라내어 이곳의 논리나 이곳의 서사로는 엮이지 않는 ‘다른’ 장소가 되게 한 장 한 장 옮겨, 다시 ‘수평-되게’ 조립해 나간다. 수평이라는 관념과 실제가 물성과 운동으로 현현하는 수평-되기의 반복. 나의 작업에서 ‘자리이동(displacement)’이야말로 완결판이 아닌, 일시적이고 이질적인(specific) 장소 생성 개념의 실천인 것이다.
(따라서) 내가 하려는 것은 폭포와 수평을 재현하려는 것도, 표현하려는 것도 아니다. 이 세상의 리얼리즘을 반영하는 것과는 먼 ‘다른 장소’ 하나를 ‘추가(de-veloping)’하는, 일종의 불확정적인 ‘거름(filter)’ 행위이다. 물의 의지를 담아내는 그릇, 의지의 표면을 캐스팅하는 알맹이 없는 행위… 여기서 현실적 텍스트를 여과할 수밖에 없는 것은 말하자면 ‘단일 주체적 시각’을 걸러내는 운동을 얻고자 하기 때문이다.
과거란 수정될 수 있다는 보르헤스적 개념처럼, 나의 현재 작업이란 끊임 없는 과거와의 상호 인과적 수정이다. 따라서 나의 작업에 지난 과거란 따로 없다. 오로지 현재뿐이다. 이는 나의 작업세계에서 아카이빙이 허락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따라서) 과거가 지금의 원인으로 작동하는 연대기적 시간관이 현재를 억압하고 구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지금이 원인이 될 과거에 침투하여 얼마든지 과거를 재/창출하고 다르게 작동시킨다. 드러냄과 감춤의 이중의 시간이란 얼마든지 상호 인과적인 즉, ‘시대착오(ana-chronism)’의 시간으로 살아나기 때문이다.
---- ‘본다는 것’은 시지각 만의 문제가 아니라 ‘신체적 행위’이다. 그것은 공간에 노출되거나 포획된 우리의 몸이 느끼는 감각이고 몸의 경험이다. 이렇게 우리의 신체를 포획하는 작업과 엮이는 것은 우리 지각의 깨움과 불확정성에 대한 몽환적인 곡예이기도 하다.
- 홍명섭
홍명섭 설치작품 <땅바닥 굴곡 측정기>(2023)
홍명섭의 설치작품 <땅바닥 굴곡 측정기>(2023)
그림자 없는 조각(shadowless sculpture)
헤테로토피아 조각(Heterotopia sculpture)
스페이스 테미는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을 전시공간으로 보수한 갤러리이다. 관객이 스페이스 테미의 대문에 도착하면 대문 계단을 따라 흘러내린 컬러풀(Colorful)한 실들을 만난다. 그것은 일종의 ‘매듭 끈’으로 직경 3mm 두께의 색실들이다. 색실들은 기본 크레용의 색상과 마찬가지로 12색이다. 도대체 누가 아름다운 색실들을 계단에 떨어뜨린 것일까?
관객이 화려한 색실들을 따라 마당으로 들어서면 정원 한가운데 수직으로 세워진 거대한 ‘컬러 분수(Color spring)’를 마주한다. 3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컬러 분수는 다양한 꽃들로 가득한 정원 한가운데 피어난 마치 ‘꽃 분수(flower spring)’처럼 보인다. 따라서 ‘꽃 분수’는 꽃밭에 피어난 일종의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라고 할 수 있겠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가 『말과 사물』에 언급한 ‘헤테로토피아’는 ‘다른’, ‘낯선’, ‘혼종된’이란 뜻의 ‘헤테로(heteros)’와 ‘장소’라는 뜻의 ‘토포스(topos)’를 접목한 일상의 공간과 ‘다른 공간’이란 의미를 지닌 장소성의 개념이다. 만약 ‘유토피아(utopia)’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장소라면, ‘헤테로토피아’는 현실에 실재하는 유토피아적 장소라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유토피아가 위치가 ‘없는’ 유토피아라면, 헤테로토피아는 위치가 ‘있는’ 유토피아라고 말이다. 따라서 유토피아와 헤테로토피아는 일종의 ‘짝패의 장소’라고 할 수 있겠다.
홍명섭은 일상의 공간에 새롭게 구축한 헤테로토피아에 우리를 초대한다. 그는 거대한 ‘컬러 분수’에 물 대신에 다양한 색실들을 뿜어내도록 연출해 놓았다. 3미터에 달하도록 솟구친 색실들은 지상을 향해 흘러내린다. 색실들은 마치 몸을 가볍게 떨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것은 산들바람에 색실들이 흔들리는 것을 착각한 것이다. 더욱이 색실들은 바람에 흔들려 나타남과 사라짐을 반복한다.
‘컬러 분수’에서 뿜어낸 색실들은 마치 물처럼 화단의 꽃들 사이로 흘러내린다. 스페이스 테미의 화단은 평평하지 않고 굴곡이 다채롭다. 따라서 색실들은 굴곡진 화단을 따라 굽이쳐서 흘러내린다. 그리고 색실들은 화단의 ‘턱’을 넘어서 마당의 바닥으로 확장해 흐른다. 어느 가닥들은 대문의 계단을 따라 흘러내린다. 굽이쳐서 흘러내린다.
머시라? 홍명섭이 색실로 분수를 ‘재현’하는 것이냐고요? 아니다! 그는 색실로 분수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재현’한다기보다 차라리 현실의 장소에 그는 자신의 시선과 방식으로 현실에 유토피아를 구축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우리는 흔히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물은 늘 수평을 찾아 흐른다고 말이다. 따라서 홍명섭의 설치작품은 ‘수평에의 의지’를 보여주는 작업이다. 그렇다면 그는 색실들로 굴곡진 지면을 ‘캐스팅’하는 것이 아닌가? 홍명섭의 육성을 직접 들어보자.
“제가 색실들로 작업하고자 하는 것은 불규칙한 마당 바닥의 경사들(땅바닥)을 ‘캐스팅’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제목도 ‘땅바닥 굴곡 측정기’로 불러 봅니다.”
홍명섭의 설치작품 <땅바닥 굴곡 측정기>(2023)는 ‘그림자 없는(shadowless)’ 조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말하자면 그것은 직경 3mm 두께의 색실들로 설치한 일명 ‘레벨-캐스팅(level casting)’이라고 말이다. 따라서 그의 ‘그림자 없는’ 조각은 전통적인 ‘유토피아적’ 조각에 문제를 제기하는 ‘헤테로토피아적’ 조각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면 그는 일종의 ‘토폴로지컬 조각(topological sculpture)’을 통해 헤테로토피아의 위상학인 ‘헤테로토폴로지(heterotopologyh)’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단편적인 정보들은 홍명섭의 설치작품 <땅바닥 굴곡 측정기>(2023)가 일명 ‘넥스트-도어 앨리스’라는 점을 알려준다. 왜냐하면 그의 작품은 우리 상식과 통념을 뒤집는 발상의 전환과 일탈의 묘미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의 헤테로토피아는 관객에게 ‘일탈의 장소’를 제공한다. 말하자면 그는 우리에게 현실에 구축한 유토피아(헤테로토피아)의 위상학를 선사한다고 말이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 우리에게 상상력을 풍요롭게 확장시키는 ‘토폴로지컬 사유(topological thought)’를 제안한다. 그리고 ‘토폴로지컬 사유’는 우리의 일상을 생소하고 신비한 세계로 안내할 것이다.
홍명섭 설치작품 <땅바닥 굴곡 측정기>(2023)
우연한 만남(RENCONTRE)
나는 재료를 만드는 작업자입니다. 쓰임이 다 된 것들에 대한 관심이 있고 그것들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합니다. 그들도 존재의 기억을 담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수집하고, 그 재료에 수집자인 ‘나’라는 기록을 추가하여 형태가 다른 새로운 재료를 만듭니다. 이 재료는 나에게 있어 또 다른 기억을 담을 잠재적 재료로 존재합니다. 나와 다시 생을 시작한 재료는 나와 나를 둘러싼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프로젝트로 사용되고 이를 통해 다른 형태를 가진 재료로서 전시됩니다.
살아있는 모든 존재는 작고도 거대한 리듬으로 반복에 반복을 연결하여 생존합니다. 끊임없이 작게 분열 가능한 그 반복의 연결고리들을 바라보고 탐구하다 보면 여러 가지 흔적들을 발견합니다. 누군가가 존재하기 때문에 행동하고 그것의 반복이 일어나지만, 반대로 어느 순간 더 이상 실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그 대상의 증명은 그가 남긴 반복적 행동의 자취를 확인하는 것으로 가능해집니다.
나는 지난 몇 년간 나의 존재가 흐려지는 시간을 보내게 되었고 ‘나’라는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절박하게 스스로의 반복된 행동을 추적했습니다. 이 작업은 그 기록을 바탕으로 나의 존재를 가까스로 증명했던 그 기간을 형태로 보여줍니다. 나라는 사람을 표현할 길이 사라진 상태에서 내 존재의 기록을 남겨야 했던 순간, 그렇게 뜨개질이 시작되었습니다. 뜨개질이 된 실의 길이가 길어지고 내 존재의 기록이 물리적으로 늘어나는 것을 보며 나의 불안감도 조금씩 지워졌습니다. 무채색으로 사라져가던 나는 그렇게 강렬한 색으로 발광하는 에너지를 붙잡았습니다. 그렇게 나의 고통을 담은 재료는 1684미터가 되었습니다.
처음 흰 실을 사용하게 된 것은 단순히 어머니가 친구분께 얻으신 흰색 실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뜨개질로 단색 면사의 형태를 바꾸며 새로운 재료를 만드는 작업 중에 이제까지와는 다른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과거 화려한 색실을 사용하며 그것이 주는 색의 정보들, 발광하는 에너지를 이용했던 것과는 달리 단색의 실을 만지는 그 반복, 그리고 그것이 서로 만나고 엉키는 모습이 내주는 견고한 에너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색실이 나의 고통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면, 흰 실은 그 기억이 지나간 나를 한걸음 떨어져 바라보는 순간들을 담고 있습니다.
재료를 모으고 변형시켜 나의 새로운 재료-오브제로 만든 후에는 항상 전시공간과의 긴장된 만남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는 설치 공간까지 작업의 재료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만든 재료와 공간이라는 재료가 만나는 지점에는 항상 어떤 식으로든 예측하지 못한 밀당이 일어납니다. 어떤 공간은 장소의 존재 방식만으로 수월한 만남이 이뤄지기도 하고 어떤 공간은 내가 준비한 재료와의 화합이 어려워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렇게 재료와 공간의 만남, 그 화합을 위한 시도를 수없이 반복하는 것으로 설치를 해 나갑니다.
스페이스 테미에서의 수 없는 시도는 공간을 채우는 것을 넘어서 결국 실로 서로를 당기는 방식, 즉 지붕과 바닥이 가까워지려고 서로 당기는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수백 번 못을 박으며 설치를 고민하는 과정 중에 발견된 규칙으로 조금 더 유기적으로 천장과 바닥, 그리고 바닥과 벽이 만나는 모서리를 사용하여 그것들이 어떤 식으로 서로를 끌어안을 수 있는지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서로의 정보가 날아가 교환되는 과정에서 타자를 인식하고 그 존재와의 만남이 일어납니다. 이 전시를 준비하며 설치하는 과정을 통해 나와 재료와 공간이 만나서 서로의 에너지를 교환하며 서로의 존재를 인지하고 끌어안는 경험이 되었습니다.
- 현지정
현지정 작가의 작품들 설치광경_스페이스 테미. 2023
현지정 <만두 테미>(2018/2023)
현지정의 <만두 테미>(2018/2023), <여기 테미> 시리즈, <거울>
변화하는 오브제
‘포스트-스튜디오(post-studio)’ 설치작업
당신이 스페이스 테미의 정원에서 실내 전시공간으로 들어서면 입구에 설치된 일종의 컬러풀한 ‘조각보’를 만난다. 그것은 천장에서 매달은 흰 실과 색실들로 설치되어 공중에 부유하고 있다. 현지정은 그것을 <만두 테미>(2018/2023)로 부른다. 그런데 그녀의 <만두 테미>는 201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녀의 육성을 직접 들어보자.
“스페이스 테미의 전시장 입구에 설치한 ‘만두피’는 2012년부터 명상(그러니까 고통스러운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반복적 행위를 통한 작품생산방식) 목적과 색을 섞은 것을 실험해 보려고 실로 뜨개질한 조각들어었어요. 그것들은 조각들로 있다가 2018년 이어붙이기를 해서 무엇인가를 담는 모양, 그러니까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거대한 ‘만두피’로 만든 것입니다.”
현지정은 2018년 레지던시(FOND REGIONAL D’ART CONTEMPORAIN, CENTRE INTERNATIONAL CAPRIN A LINAZAY)를 하고 결과보고전을 개최한다. 당시 그녀는 건물 출입문 통로에 일명 ‘만두피’를 설치한 <만두 조각(Plastique Mandoo)>(2018)을 선보인다. 그녀가 설치한 <만두 조각> 안에는 주변에서 하루동안 수집한 플라스틱 오브제들을 담았다.
현지정은 이번 스페이스 테미의 출입문 통로에 ‘만두피’를 설치한다. 그 ‘만두피’ 안에는 테미로 골목길에서 수집한 비닐봉지들이 들어있다. 따라서 그녀의 <만두 조각>은 5년 후 <만두 테미>로 변신한 셈이다. 이를테면 그녀의 ‘만두피’는 다시 둘둘 말아서 다른 장소로 이동할 수 있다고 말이다. 따라서 그녀의 ‘만두피’는 장소에 따라 형태가 변화하게 될 것이다. 난 장소에 따라 변화하는 그녀의 ‘만두피’를 ‘변화하는 오브제’로 부르고자 한다.
현지정의 <만두 테미>는 관객의 동선을 방해하는 높이와 위치에 설치되어 있다. 따라서 관객은 그녀의 <만두 테미>를 통과해야만 그녀의 또 다른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녀의 <만두 테미>는 일종의 ‘통과의례’가 아닌가? 만약 당신이 그녀의 <만두 테미>를 통과하면 두 갈래 길을 만난다. 당신이 오른쪽 방으로 들어서면 정방형의 전시장에 흰 실들로 설치된 <여기 테미 I>(2023)을 만난다.
현지정 설치작품 여기 테미 I(2023)
현지정의 <여기 테미 I>은 흰 실들을 천장의 V자형 대들보를 이용하여 마치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천장에서 바닥을 향하도록 설치해 놓은 설치작품이다. 뭬야? 당신의 눈에는 <여기 테미 I>이 마치 비가 내리는 것처럼 보인다고요? 네? 그것이 자기 눈에는 일종의 ‘커튼’으로 느껴진다고요? 그런데 흰 실들은 중간중간에 매듭이 있는 것이 아닌가. 현지정은 흰 실의 출처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머니의 지인 분께서 운영하시던 공장이 페쇄되어 버려지려던 실을 수집한 것입니다.”
현지정 설치작품 <여기 테미 II>(2023)
당신이 <여기 테미 I>을 보고 두 번째 전시공간으로 들어서면 <여기 테미 II>(2023)를 만나게 된다. 그것은 기다란 직사각형의 전시공간을 따라 서로 마주 보는 벽면들에 매듭들이 있는 흰 실들을 포물선을 그으면서 설치한 작품이다. 현지정은 한쪽 벽면에 흰 실들을 한 점에 모아 설치한 반면, 그녀는 그 흰 실들을 반대편 벽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설치해 놓았다. 따라서 그것은 한 점에서 다양한 점들로 확장되는 것으로 보이는가 하면 거꾸로 다양한 점들에서 한 점으로 모여지는 것으로도 보인다.
그런데 관객이 한 점에서 다양한 점들로 접근하면 갑자기 불이 켜진다. 그렇다! 현지정은 관객이 <여기 II>로 한 걸음 더 들어가고자 하면 센서에 의해 조명이 켜지도록 설정해 놓은 것이다. 한 점에서 확장된 다양한 점들에 설치된 흰 실들 조명으로 인해 그림자들을 벽면에 그려놓는다. 흰 실들의 그림자들은 흥미롭게 다양한 점들에 설치된 흰 실들을 더 확장한다. 따라서 그녀의 <여기 테미 II>는 마치 현실의 실과 가상의 실(그림자)이 ‘짝패’를 이루어 새로운 장소를 만들어 놓는다.
자, 이번에는 아직 가지 않은 길로 가보도록 하자. 현지정은 <만두 테미>를 기점으로 왼쪽 방들에 색실들로 환상적인 <여기 테미 III>(2018/2023)와 <여기 테미 IV>(2018/2023)를 설치해 놓았다. 그녀의 <여기 테미 III>는 컬러풀한 색실들을 대들보에 마치 미역을 말리듯 설치해 놓은 반면, 그녀의 <여기 테미 IV>는 컬러풀한 색실들을 스페이스 테미의 삼각형 지붕구조를 따라 삼각의 모습으로 설치해 놓았다.
현지정 설치작품 <여기 테미 III>(2018/2023)
그런데 현지정이 사용한 색실들도 흰 실들과 마찬가지로 중간중간에 매듭들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색실들을 여행하거나 처음 가본 도시들에서 구매한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그녀의 색실들은 다양한 컬러처럼 다양한 지역의 문화를 담고 있는 셈이다. 그녀는 다양한 지역에서 구매한 색실들을 모아서 공간에 설치하는 일종의 ‘드로잉’ 작업을 2018년 래지던시 결과보고전에 선보인다.
현지정 설치작품 <여기 테미 III>(2018/2023)
현지정 <선물>(2023)
현지정의 <천육백팔십사미터 : 나의 고통은 하나의 재료가 된다 2018(1684m : Ma souffrance est devenue un ingredient 2018)>은 거대한 창고 전시공간에 1684미터의 색실들을 설치한 작품인 반면, 2018년 리나제(Linazay)에서 선보인 1684미터 색실 작품은 자연광이 들어오는 나무판자들로 지어진 공간에 마치 거미줄처럼 설치한 작품이다. 후자의 작품은 관객이 색실로 만든 거미줄들을 피해 통과하도록 하는 일종의 ‘놀이작품’인 셈이다.
이러한 단편적인 정보들은 현지정의 ‘색실’ 작품들이 같은 실을 가지고 다양한 장소에서 매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사라진다는 것을 알려준다. 말하자면 그녀의 설치작품은 전시하는 장소의 특성에 따라 다르게 연출된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그녀의 ‘색실’ 작품은 절대적인 고정된 형태가 아니라 늘 변화하는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 그녀는 같은 색실들로 반복을 통한 차이를 드러낸다. 따라서 그녀의 설치작품은 예술가의 창작 과정이 행해지는 사적 공간인 스튜디오가 아닌 작품이 설치되는 전시공간인 일명 ‘포스트-스튜디오(post-studio)’ 작업이라고 할 수 있겠다. 두말할 것도 없이 그녀의 <여기 테미> 시리즈는 일정 기간 전시된 후 해체될 것이다.
관객이 현지정의 <여기 테미 IV>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벽면에 기대어 놓은 거울 하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 거울은 서로 마주 보는 벽면들에 설치된 황홀한 색실들을 비춘다. 오잉? 색실들이 만들어 놓은 환상적인 삼각형 안에 우리의 모습도 담겨있는 것이 아닌가. 현지정은 이 작품을 <선물>(2023)이라고 부른다. 그녀는 <선물>을 “길에서 우연히 수집한 거울”이라면서, 그녀는 “거울이라는 재료를 좋아해서 작품설치 시 고민을 할 때 사용한다”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일단 거울이 수많은 시각 이미지를 담는 사물이다 보니 ‘산책’이라고 작명해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