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그리고

도수진 & 박정기
2024.07.18 – 08.17
space TEMI
대전광역시 중구 테미로 44번길 40

전시오픈 : 매주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오픈시간 : 오후 12시부터 6시까지
전시휴관 : 매주 일요일, 월요일
공동기획 : space TEMI 김주태 큐레이터 & 갤러리 R 류병학 큐레이터

도수진 작가는 독일 뮌스터 예술대학(ACADEMY OF FINE ARTS MEUNSTER)에서 아카데미 브리프(석사)와 마이크 & 디억 뢰버트(Maik & Dirk Loebbert) 교수로부터 마이스터슐러(Meisterschuler)로 사사받고 한국으로 귀국한 작가입니다.

그녀가 국내외에서 개최한 개인전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2012년 독일 뮌스터 쿠바 쿨투어의 『텅 빈 방들(Empty Rooms)』과 프로젝트 하펜벡 22의 『Einsichten in Aussichten』 그리고 2013년 베베어카 파빌리온(Wewerka Pavillon)의 『Behind the Doors』 또한 2022년 인천 차 스튜디오(CHA studio)의 『곤충인간 / 昆蟲人間』입니다.

그녀는 다수의 국내외 그룹전에 초대되었습니다. 그녀가 해외에서 초대되었던 주요 그룹전은 다음과 같습니다. 2008년 독일 쿤스트 페어라인 겔젠 키르센의 『New Grass』, 2009년 독일 하노버 슈티프퉁 호리존테 쿤스트라움 44의 『so fern-so nah』, 독일 뮤지엄 슐로스 슈바르첸베르거의 『Schwarzenberger Kunstpreis art-figura』, 2010년 독일 루어 프로젝트 『Über Wasser gehen』, 2011년 독일 AZKM의 『Föderpreis 2011』, 독일 쿤스트 페어라인 알렌의 『The Temporary Institute of Retrospection』, 2012년 이탈리아 컨템포러리갤러리 메란의 『Die da ist mit der da da (...)_ES』, 독일 뒤셀도르프의 『KUNSTPUNKTE Düesseldorf 2012』, 2013년 예나 쿤스트 페어라인의 『Brandschutz』, 독일 두이스부룩 란트샤프츠 파크의 『Emscher Kunst 2013』, 독일 도르트문트 코커라이 한자의 『Emscher Kunst 2016』 등입니다.

그녀의 국내 주요 그룹전은 다음과 같습니다. 2014년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의 『FOLLOW ME』, 송은아트스페이스의 『14th 송은미술대상』,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난지 전시실의 『Heavy Habit』, 2015년 울산 태화강 대공원의 『태화강 국제 설치 미술제』, 2016년 고양 아람누리 미술관의 『What is art?』, 소마미술관의 『야외 프로젝트 S』, 인천 Cosmo40 메인 홀의 『겹 물결 : Living Fragment』, 등을 국내 주요 그룹전으로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도수진 작가는 2014년 SeMA 난지 창작 스튜디오와 2015년 경기창작센터에 입주했습니다. 그녀는 2014년 송은아트스페이스의 ‘송은미술대상’을 수상한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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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기 작가는 독일 뮌스터 미대(ACADEMY OF FINE ARTS MEUNSTER)에서 <새로운 슈퍼마켓(Neuer Supermarkt)>으로 새로운 ‘레디-메이드’를 제시했던 기욤 바일(Guillaume Bijl) 교수로부터 마이스터슐러(Meisterschuler)로 사사받고 귀국한 아티스트입니다.

그는 국내외에서 수차례 개인전을 개최한 바 있습니다. 우선 그가 유학했던 독일에서 개최한 개인전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2009년 독일 뮌스터의 베베어카 파빌리온(Wewerka Pavillon)에서 개인전 『미술관을 위한 미술관(Museum for Museum)』, 2010년 독일 쿤스트 아카데미 뮌스터에서 개인전 『창의적 순간으로써의 멜랑꼴리(Melancholie als kreatives Moment)』, 2013년 독일 뮌스터 아펜가 22번지(Hafenweg 22) 건축물에서 개인전 『극장 아닌 극장(Theater_Kein Theater)』 등이 그것입니다.

박정기 작가가 독일 유학 생활을 마치고 국내로 귀국해 개최한 개인전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2016년 카이스트(KAIST) 경영대학 리서치 & 아트갤러리(Research & Art Gallery)에서 개인전 『달콤함의 무게(Weight of Sweetness)』, 2017년 봉산문화회관에서 개인전 『헬로 컨템포러리 아트 I_정원(Hello Contemporary Art I_Garden)』, 2018년 대구미술관에서 개인전 『걷다 쉬다(Walk & Rest)』, 2019년 세컨드 에비뉴갤러리의 개인전 『창작의 열쇠』, 2021년 스페이스 자모의 개인전 『창작의 열쇠 - 검독수리』가 그것입니다.

그는 다수의 국내외 그룹전에 초대되었습니다. 그의 주요 그룹전을 들자면 다음과 같다. 2010년 독일 알렌(Ahlen)의 쿤스트 뮤지엄의 『란트파티(Landpartie)』, 2011년 벨기에 겐트(Gent)의 『KASK』, 리투아니아의 카우나스 포토그래피 갤러리의 『At Home - on the Road』, 2012년 독일 뒤셀도르프의 『쿤스트푼크테 뒤셀도르프 2012(KUNSTPUNKTE Duesseldorf 2012)』, 구스타브 륍케 뮤지엄(Gustav Luebke Museum)의 『Here and Now』, 2013년 국립현대미술관 고양창작스튜디오의 『사건들』, 2015년 문화역 서울284의 『은밀하게 황홀하게』, 울산 『태화강 국제설치미술제』, 2016년 서울시립 북서울시립미술관 『구사구용』, 2017년 뮌헨 국립 독일 박물관의 『에너르기, 벤덴(Energie, wenden)』, 이탈리아 베니스 아르세날(Arsenal in Venedig) 『아르테 라구나 프라이즈(Arte Laguna Art Prize)』, 2019년 청주시립미술관 오창관의 『레디컬 아트(Radical Art)』 등입니다.

박정기 작가는 2017년 국제 아르떼 라구나 프라이즈(Arte Laguna Prize)의 파이널 리스트(Finalist)에 올랐고, 같은 해 대구미술관의 ‘Y+아티스트’에 선정되었습니다. 그의 작품은 독일전기회사(RWE Deutschland AG)와 청주시립미술관 그리고 개인 컬렉터가 소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머시라? ‘그리고 그리고’는 그림을 계속 그린다를 뜻하는 것이냐고요? 뭬야? ‘그리고 그리고’는 단어나 구 그리고 절이나 문장 따위를 병렬적으로 연결할 때 쓰는 접속부사를 의미하는 것 같다고요? 도수진 & 박정기 작가의 2인전 타이틀 『그리고 그리고』는 바로 그림을 ‘그리고’와 접속부사 ‘그리고’를 합친 것이라고 한다. 도수진 작가의 육성을 직접 들어보자.

“드로잉(drawing)과 페인팅(painting)은 ‘draw’와 ‘paint’의 현재분사형으로 ‘그리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저는 이 그리는 행위를 마치 수많은 점이 모여 선을 만들고 사물의 윤곽을 끌어내듯 계속 이어갈 때만 그 의미가 생성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번 전시 제목인 ‘그리고 그리고’는 그리는 행위의 ‘그리고’와 접속부사의 ‘그리고’가 합쳐진 의미로 정하게 되었습니다.”


도수진_드로잉 룸. 종이에 연필, 먹, 과슈_가변크기. 2023-2024

이번 스페이스 테미의 도수진 & 박정기 2인전 『그리고 그리고』에 도수진 작가는 드로잉 470여 점과 페인팅 16점을 그리고 박정기 작가는 페인팅 13점을 전시한다. 만약 관객이 스페이스 테미를 방문한다면, 무엇보다 먼저 일명 ‘드로잉 룸(drawing room)’에 들어서게 될 것이다. 도수진 작가는 4면의 전시공간에 드로잉 470여 점을 빼꼭하게 연출해 놓았다. 따라서 관객은 마치 드로잉 세계에 들어선 것처럼 느껴진다. 물론 그 드로잉 세계는 도수진 작가의 세계이다. 이를테면 관객은 작가의 뇌 속에 들어선 느낌을 받는다고 말이다.

그녀는 작년 11월부터 드로잉을 시작했는데 “하루 1장에서 3장 정도 꾸준히 하려고 노력했다”면서 “아주 사소한 그 날의 사건이나 감정을 그렸고 언어로 정리되기 전 무의식에 가까운 것들을 그리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그리고자 했다”고 말한다. 머시라? 당신이 도수진의 ‘드로잉 룸’ 한가운데 서 있으니 현기증이 날 것 같다고요? 뭬야? 자기는 470여 점의 드로잉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고요? 도수진이 드로잉을 자유롭게 그리고자 했듯이, 관객도 470여 점의 드로잉을 자유롭게 보면 된다. 그녀의 드로잉은 시작과 끝이 없다. 더욱이 그녀의 드로잉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도수진의 ‘드로잉 룸(drawing room)’

도수진은 드로잉과 회화에서 ‘동사(~ing)’, 즉 행위에 주목한다. 따라서 ‘그리고 그리고’는 (그림을) ‘그리고’ (접속부사) ‘그리고’ (그림을) 그리고... 라는 지속성을 암시한다. 그녀는 그림을 그린다는 것을 “마치 산꼭대기에 밀어 올린 바위가 산꼭대기에 닿자마자, 바위 밑으로 굴러 내려가 시작점에 다시 놓여 있는 시지프(Sisyphe)의 형벌처럼” 느낀다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삶을 생각할 때 알지 못하는 낯선 세계를 외롭게 여행하고 있는 보이저(Voyager)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힘에 의해 발사된 방향으로 무한히 홀로 나아가는 고독한 존재로, 아니 어쩌면 시지프의 형벌처럼 반복되는 무의미한 고통 속에서 부조리한 삶을 살아가는 가는 존재로 느껴진다. 이런 고독과 무의미한 삶을 즐겁게 받아들인다면 어떤 의미가 생겨날까?”

시지프가 산 밑에서 돌을 굴려 산 정상에 올려놓으면, 돌은 반대편 산 밑으로 굴러간다. 그러면 그는 돌을 따라 산 밑으로 내려가 다시 산 정상으로 돌을 굴려야만 한다. 알베르 카뮈(Albert Camus)는 시지프의 형벌에서 ‘부조리한 인간’의 전형을 발견한다. 말하자면 시지프의 끊임없는 노동이 오늘날 노동자들의 삶과 닮았다고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살기 때문이다.

도수진 역시 작업실에서 매일 그림을 ‘그리고’ 그리고 ‘그린다.’ 하지만 그녀는 고독과 무의미한 삶을 즐겁게 받아들인다면 어떤 의미가 생겨날까? 자문한다. 카뮈는 철학적 에세이 『시지프의 신화(Le Mythe de Sisyphe)』(1942)에서 시지프의 반복되는 노동을 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이 사람이 무겁지만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아무리 해도 끝장을 볼 수 없을 고통을 향하여 다시 걸어 내려오는 것을 본다. 마치 내쉬는 숨과도 같은 이 시간, 또한 불행처럼 어김없이 되찾아오는 이 시간은 곧 의식의 시간이다. 그가 산꼭대기를 떠나 제신의 소굴을 향하여 조금씩 더 깊숙이 내려가는 그 순간순간 시지프는 자신의 운명보다 더 우월하다.”

와이? 왜 카뮈는 시지프의 부질없는 노동을 그의 운명보다 더 우월한 것으로 본 것일까? 왜냐하면 카뮈는 산꼭대기에서 내려오는 시지프의 시간을 ‘의식의 시간’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의식의 시간’은 자신의 부조리한 운명을 각성(覺醒)하는 시간이다. 따라서 시지프의 ‘각성 시간’은 부조리한 운명을 넘어서는 계기가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까뮈가 말한 ‘부조리한 인간’은 부조리를 의식하고 그것을 극복하며 사는 인간을 뜻하는 것이 아닌가? 시지프는 형벌 안에서도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일말의 의미를 찾아낸다. 그래서 카뮈는 우리에게 “행복한 시지프를 상상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왜 도수진이 고독과 부질없는 그림 그리기를 즐겁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는지 아시겠죠?

도수진의 ‘페인팅 룸(painting room)’

당신이 도수진의 ‘드로잉 룸’을 지나면 그녀의 ‘페인팅 룸’을 만난다. 15점으로 이루어진 그녀의 ‘페인팅 룸’ 시작은 <현기증>(2024)이다. 그것은 소용돌이 속에 서 있는 소녀를 그린 그림이다. 그것은 작년 서울 성수동 갤러리 JY(Gallery JY)에서 열렸던 그녀의 개인전 『버티고 & 버티고(Vertigo & Vertigo)』에 출품한 영상작품의 부분을 캔버스에 아크릴물감으로 그린 그림이다.


도수진_페인팅 룸_Acrylic guoache on canvas_가변크기. 2024

이번 스페이스 테미에 전시된 도수진의 페인팅 16점은 모두 2024년에 작업한 신작이다. 그 중에서 6점은 2013년 개인전에 전시되었던 영상작품들에서 특정 부분을 회화로 작업한 것이다. 그녀의 <현기증>과 <버섯> 그리고 <가면>과 <죽음과 소녀 2024(Death and the Maiden 2024)> 또한 <칼을 든 소녀>와 <푸줏간 소녀>가 그것이다. 이 6점이 일종의 ‘버티고 & 버티고’ 시리즈라면, 나머지 10점은 ‘그리고 그리고’ 시리즈라고 할 수 있겠다.


도수진_현기증_Acrylic on canvas_32×41cm. 2024

버티고 & 버티고? 도수진은 <현기증>을 “과거 성장기 충격으로 인해 정서적인 혼란과 심리적 불안으로 생겨난 현기증과 디지털 시대로의 시각적 인지 환경의 급속한 변화로 인한 현기증이 동시에 발생하는 자전적 상황을 표현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녀는 ‘버티고 & 버티고’가 “내면과 외부 환경이 제각기 동시에 돌고 있는 상태를 표현하며 어지러움과 혼돈이 극심한 상태를 상징한다”면서 “불안정한 상태를 의미함과 동시에 삶 속에서 이러한 시간들을 버티고 버터야 하는 고통의 과정을 내포하고 있다”고 진술한다. 이러한 단편적인 정보는 도수진의 ‘페인팅 룸’이 부조리한 삶을 버티어내는 ‘버티고 & 버티고’ 시리즈에서 부조리한 삶을 즐기는 ‘그리고 그리고’ 시리즈로 넘어가는 과정의 회화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도수진의 <버섯>은 빨간 버섯(독버섯) 산양 뿔이 난 소녀를 그린 그림이라면, 그녀의 <가면>은 토끼 탈을 벗어 손에 들고 있는 소녀를 표현한 회화라고 할 수 있겠다. 그녀의 <죽음과 소녀 2024>는 제목 그대로 ‘죽음과 소녀’를 그린 그림이다. 그것은 마리안 스톡스(Marianne Stokes)의 <죽음과 소녀(Death and the Maiden)>(1908)를 차용한 회화이다. 도수진은 마리안이 그린 검은 날개와 검은 의상을 입은 저승사자를 담배를 피우며 선글라스를 쓴 사슴벌레로 변신시켰다. 도수진은 저승사자를 두려워하는 소녀에게 시인 마티아스 클라우디우스(Matthias Claudius)의 시 <죽음과 소녀(Der Tod und das Madchen)>에서 말한 ‘나는 너의 친구’라는 것을 주목한 것으로 보인다.


오른쪽) 도수진_버섯_Acrylic gouache on canvas_32×41cm. 2024
왼쪽) 도수진_가면_Acrylic on canvas_32×41cm. 2024


도수진_Death and the Maiden 2024_Acrylic gouache on canvas,_32×41cm. 2024


오른쪽) 도수진_칼을 든 소녀_Acrylic gouache on canvas_32×41cm. 2024
왼쪽) 도수진_푸줏간 소녀_Acrylic gouache on canvas_32×41cm. 2024

도수진의 <칼을 든 소녀>는 제목 그대로 ‘칼을 든 소녀’를 그린 그림이라면, 그녀의 <푸줏간 소녀>는 칼을 든 돼지 탈을 쓴 소녀를 표현한 회화라고 할 수 있겠다. 고양이 원피스를 입은 오른손에 ‘칼을 든 소녀’는 왼손에 남자 머리를 잡고 있다. 바닥에는 피와 잘린 손이 놓여 있다. 그런데 잘린 손은 무엇인가 잡고 있다. 그것은 문고리이다. 그렇다면 소녀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서려고 문고리를 잡은 남자의 손을 칼로 자른 것이란 말인가? 더욱이 그녀는 남자의 머리도 칼로 잘라버리지 않았는가? 도대체 남자가 소녀에게 무슨 짓을 했기에 소녀는 ‘괴물’로 변신하게 된 것일까?

도수진의 <푸줏간 소녀>는 오른손에 식칼을 왼손에 사과를 들고 있다. 바닥에는 피와 사과들이 놓여 있다. 그런데 돼지 탈을 소녀의 목에서 피가 흐르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정작 칼이 베인 것은 다름 아닌 돼지 탈을 쓴 소녀의 목이 아닌가? 하지만 식칼에는 피가 묻혀있지 않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칼을 든 소녀>도 피가 묻혀있지 않은 칼을 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문득 패트릭 맥케이브(Patrick McCabe)의 소설 『푸줏간 소년(The Butcher Boy)』(1992)이 떠오른다. 수도원에서 생활하던 프란시에게 신부는 보닛을 씌우고 여장시키며 나쁜 짓을 털어놓으라고 한다. 프란시는 ‘나쁜 짓을 한 적이 없다’고 소리 지르면서 신부를 칼로 찌른다. 물론 도수진의 <푸줏간 소녀>는 여장한 남자가 아니라 돼지 탈을 쓴 소녀이다. 와이? 왜 소녀는 ‘돼지 되기’를 자처하는 것일까? 혹 소녀는 돼지 탈을 써야만 ‘진짜’ 괴물을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오른쪽) 도수진_After Work_Acrylic on canvas_32×41cm. 2024
왼쪽) 샤워_Acrylic gouache on canvas_32×41cm. 2024


도수진_뒷모습_ Acrylic gouache on canvas_32×41cm. 2024

‘푸줏간 소녀’는 <일이 끝나면(After Work)> 마치 가면을 벗는 것처럼 몸의 가죽을 벗어 옷걸이에 걸어놓고 머리에 쓴 가발도 벗어 가발 거치대에 씌어 놓는다. 그리고 소녀는 <샤워>를 한다. 소녀가 여인으로 성장한 것일까? 오른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잡은 여인의 <뒷모습>은 마치 타투(Tattoo)한 모습처럼 보인다. 몸에 그려진 이미지들은 백설 공주에서부터 메두사 그리고 알 수 없는 얼굴들이다. 그렇다면 여인은 다중인격자란 말인가?


오른쪽) 도수진_침대에서_Acrylic on canvas_32×41cm. 2024
왼쪽) 도수진_7월의 연인_Acrylic gouache on canvas_32×41cm. 2024

여인은 <침대에> 누어서 천장을 바라보면 생각에 잠겨있다. 혹 여인은 <7월의 연인>과 함께했던 날을 생각하는 것일까? 혹시 그녀는 칠레 이스터섬(Easter Island)에 있는 사람 얼굴 모양의 거대한 석상인 모아이(Moai)와 (도수진의 반려견인) 보리를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보리는 거대한 모아이 석상 옆에서 졸고 있다. 바닥에는 종이와 연필이 놓여 있다. 종이와 연필은 그녀가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오른쪽) 도수진_Draw+ing 02_Acrylic on canvas_32x41cm. 2024
가운데) 도수진_Draw+ing 01_Acrylic gouache on canvas_32×41cm. 2024
왼쪽) 도수진_돌덩이_Acrylic gouache on canvas_32x41cm. 2024

그런데 종이에는 아무런 그림도 그려져 있지 않다. 작가는 매일 마주하는 하얀 종이를 보고 망설인다. 그녀는 종이에 자유롭게 드로잉 하고자 하지만 쉽지 않다. 말하자면 그녀는 종이에 자유롭게 드로잉을 하고자 하지만 그 ‘자유롭게’가 전혀 작동되지 않을 때도 있다고 말이다. 그럴 때 그녀는 벽에 머리를 박기도 한다. 그녀는 흰 종이 앞에서 절망을 느낀다. 그러나 그녀는 포기할 수 없다. 그녀는 종이와 무언의 전쟁을 벌인다. 하지만 무언의 전쟁은 지루할 정도로 길다. 그녀는 무언의 모아이 석상 옆에서 졸고 있는 보리 그림을 라고 작명한다.

도수진의 은 침대에 누워 담배 피우는 여인을 그린 회화이다. 그녀의 입으로 뿜은 담배 연기는 마치 구름처럼 보인다. 머시라? 당신의 눈에는 마치 ‘말풍선’처럼 보인다고요? 그녀의 검지와 중지 사이에 있는 담배에서 나는 담배 연기는 ‘드로잉(drawing)’이라는 단어를 그리고 있다. 파란 벽에 설치된 시계는 ‘drawing’이라는 담배 연기를 곁눈질해 본다. 물론 담배 연기는 공중으로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드로잉’을 일시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란 말인가?

도수진의 <돌덩이>는 제목 그대로 ‘돌덩이’를 그린 그림이다. 머시라? 그녀의 ‘돌덩이’가 모아이 석상을 생각하며 그린 것 같다고요? 뭬야? 당신의 눈에는 ‘돌덩이’가 무슨 ‘응어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느껴진다고요? 네? 자기 눈에는 ‘돌덩이’가 하늘에 빛나는 행성(行星)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고요? 도수진의 육성을 직접 들어보자.

“저의 마음 속 바위가 우주로 가서 별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이 볼 수 있게...”


도수진_아보카도 씨 빼는 방법_Acrylic on canvas_27×22cm. 2024

도수진의 <아보카도 씨 빼는 방법>은 제목 그대로 아보카도 씨 빼는 방법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작가는 인스타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칼날로 씨앗 머리의 가운데를 꽉 찍어서 아보카도를 기절시킨다. 칼이 꼽힌 그대로 아보카도 씨를 9시 방향으로 야무지게 돌려준다. 그럼 요오코롬 씨가 칼에 박혀 빠져나온다. 아보카도 내 뱃속으로 잘 가.”


도수진_보리와 나_Acrylic gouache on canvas_32×41cm. 2024

도수진의 <보리와 나>는 그녀의 반려견 보리와 작가의 ‘도플갱어(doppelganger)를 표현한 회화이다. 이를테면 그들은 정면을 주시하면서 서로 두 팔로 안고 있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라고 말이다. 머시라? 그들은 무엇인가를 경계하는 모습으로 느껴진다고요? 뭬야? 그들은 마치 외부로부터의 공격에 대해 서로를 보호하는 것처럼 느껴진다고요? 네? 그들의 애틋한 관계는 당신에게 다시 현기증을 일으키게 한다고요? 그녀의 매혹적인 회화는 우리에게 읽고/쓰고 다시 읽기/쓰기를 유혹한다고요?

박정기의 ‘현대판 문자도’

박정기 작가는 이번 스페이스 테미의 도수진 & 박정기 작가의 2인전 『그리고 그리고』에 회화 13점을 전시한다. 그의 작품은 모두 2024년에 작업한 신작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조선시대 ‘문자도(文字圖)’를 현대적으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여러분이 잘 알듯이 문자도는 글자의 의미와 관계있는 고사 등의 내용을 한자 획 속에 그려 넣어 서체를 구성한 그림을 뜻한다.


박정기_현대판 문자도_스페이스 테미. 2024

박정기의 ‘현대판 문자도’는 작년 차 스튜디오(CHA studio)에서 열린 박정기 & 안시형 2인전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에서 첫선을 보인다. 그의 족자화 <도를 아십니까>(2023)와 <도(道)>(2023)가 그것이다. 그의 <도를 아십니까>가 제목 그대로 ‘도를 아십니까’라는 문구에 다양한 이미지를 그려놓은 일종의 ‘현대판 문자도’라면, 그의 <도(道)>는 한자 ‘도(道)’에 각종 이미지를 그려놓은 일종의 ‘현대판 문자도’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박정기가 이번 스페이스 테미의 2인전에 전시한 ‘현대판 문자도’는 그 연장 선상에서 작업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번 신작들은 작년 작품들에서 한 발짝 더 들어간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 문자도의 구체적인 사례로 박정기의 작품을 들어보자.


박정기_약(藥)_한지에 분채 채색_91.5x74cm. 2024

박정기의 <약(藥)>은 한자 ‘약(藥)’에 각종 이미지를 그려놓은 일종의 ‘문자도’이다. 그는 해서체(楷書體)로 쓴/그린 ‘약(藥)’ 자 안에 겸재(謙齋) 정선(鄭敾)의 <관폭도(觀瀑圖)>와 <금성평사(錦城平沙)> 그리고 <설평기려(雪坪騎驪)>와 <양화환도(楊花喚渡)> 또한 셋슈(雪舟)의 산수화 일부를 그려놓았다. 다섯 점의 그림은 한결같이 자연의 고즈넉함을 표현하고 있다.

와이? 왜 박정기는 ‘약(藥)’ 자 안에 평온한 그림들을 그려놓은 것일까? 그는 <약(藥)> 문자도를 그린 이유를 영남대 미대 졸업 시기에 모 신문 귀퉁이에 채근담을 한 구절씩 주제로 연제를 하였는데, 문득 당시 스크랩한 다음의 짧은 글이 생각나서 제작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정말 약이 되는 말씀... 일 덜고 마음을 맑게 하여 고요 속에 사는 것...”

약(藥) 자는 즐거울 락(樂)에 풀 초(草)를 결합한 문자이다. 약은 흔히 몸이 아플 때 먹거나 바르는 물질을 뜻한다. 그런데 몸이 아프다는 것은 즐겁지 못한 상태를 의미한다. 락(樂) 자는 거문고와 같은 현악기를 그린 것으로 ‘풍류’나 ‘즐겁다’라는 뜻을 지닌다. 따라서 약(藥) 자는 약초(草)를 먹고 다시 즐거운(樂) 상태로 되돌아간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박정기가 약(藥) 자에 그려놓은 다섯 점의 그림은 일종의 ‘약초(草)’란 말인가? 그는 자연의 고즈넉함을 표현한 다섯 점의 그림을 그려놓아 관객에게 즐거움을 선사한다.


박정기_거(去)_한지에 먹_91.5x74cm. 2024

박정기의 <거(去)>는 한자 ‘거(去)’에 각종 이미지를 그려놓은 일종의 ‘문자도’이다. 그는 해서체(楷書體)로 쓴/그린 ‘거(去)’ 자 안에 덴쇼 슈분(天章周文)의 <십우도(十牛圖)>를 차용하여 그려놓은 것이다. 여러분들이 잘 알듯이 ‘십우도’는 선(禪) 수행과 깨달음의 단계를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하여 열 가지로 그린 그림이다. 그런데 ‘거(去)’ 자와 ‘십우도’는 무슨 관계인가? 박정기의 육성을 직접 들어보자.

“거(去)는 ‘간다’라는 한자어입니다. 갑골문에서 사람이 문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형상화하여 ‘떠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요. 운문 선사(雲門禪師)는 한 글자로 관문을 통과하는 ‘일자관(一子關)’이라는 선문답으로 유명합니다. 제자가 운문에게 ‘도(道)란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운문은 ‘거(去)’라고 답변합니다. 그래서 저는 ‘거(去)’ 자 안에 십우도를 그려놓았습니다.”


박정기_심(心)_한지에 분채 채색_91.5x74cm. 2024

박정기의 <심(心)>은 각기 다른 크기와 형태의 무들로 한자 ‘심(心)’을 그려놓은 일종의 ‘문자도’이다. 따라서 그것은 ‘무심’이 되는 셈이다. 물론 여기서 ‘무심’은 이중의 뜻을 내포한다. 하나는 (먹는) 무의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이 없음(무)을 의미한다. 박정기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자.

“무 4개로 마음(心)을 써 보았습니다. 여기서는 없을 ‘무(無)’ 자와 먹는 ‘무’가 같은 음으로 발음되기 때문에 차음하여 사용하였지요. 불교에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 이외 다른 것이 없다’고 하고 아예 무심이라고 하여 ‘마음이 없다’고도 합니다. 없는 마음을 글자로 썼는데, 무에는 무청이 자라 꽃이 피고 나비가 날아왔습니다.”


박정기_선(禪)_한지에 분채 채색_145,5x97cm. 2024

박정기의 <선(禪)>은 한자 ‘선(禪)’에 각종 이미지를 그려놓은 일종의 ‘문자도’이다. 그는 ‘선(禪)’ 자 안에 입을 벌린 얼굴에 눈알과 뇌 그리고 피와 ‘파악’이라는 단어까지 그려놓았다. 더욱이 그는 그림들을 고상한 수묵화가 아니라 만화적 기법을 차용했다. 도대체 이 기괴한 문자도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박정기의 육성을 직접 들어보자.

“저는 예술과 선(禪)의 공통점이라면 기존의 질서를 거부하고 부수는 행위를 통해서 새롭게 주체적으로 세계를 인식하려는 시도라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박정기의 <선(禪)>을 보면서 선(禪)의 ‘할(喝)’과 ‘방(棒)’을 떠올렸다. ‘할’은 언어가 아니라 고함을 질러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것을 뜻한다면, ‘방’은 막대기(棒)로 때려서 정신을 차리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겠다. 그의 <선(禪)>은 ‘방(棒)’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방’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직접 체험의 경지를 나타낼 때 차용되는 행위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그의 <선(禪)>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린 그림이 아닌가?


박정기_불(佛)_한지에 먹_145,5x85cm. 2024

박정기의 <불(佛)>은 눈 내린 잣나무를 ‘불(佛)’ 자로 표현한 일종의 ‘문자도’이다. 도대체 잣나무와 ‘불(佛)’ 자는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이란 말인가? 박정기는 “청담스님이 쓴 ‘불(佛)’ 자의 서체를 모티브로 하여 선종의 유명한 선승 조주(趙州)의 선문답을 결합한 ’문자도‘”라고 말한다. 조주의 선문답은 다음과 같다.

어느 승려가 조주 선사에게 물었다.
“달마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조주가 말했다.
“뜰 앞에 잣나무.”

박정기의 현대판 ‘효제문자도(孝悌文字圖)’

조선시대 문자도는 상징적 소재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유교적 교훈의 내용을 지닌 문자도이고, 다른 하나는 기복 신앙적 내용을 강조한 문자도이다. 전자는 ‘효제충신 예의염치(孝悌忠信 禮儀廉恥)’, ‘수복강령 부귀다남(壽福康寧 富貴多男)’, ‘효자충신 인의예지(孝子忠臣 仁義禮智)’, ‘붕우유신 원형이정(朋友有信 元亨利貞)’이라면, 후자는 ‘백수백복 만수무강(百壽百福 萬壽無疆)’, ‘길상(吉祥)’, ‘희(囍)’, ‘용호(龍虎)’, ‘귀(龜)’, ‘성(星)’, ‘심(心)’, ‘신(信)’, ‘천왕(天王)’, ‘수목토(水木土)’라고 할 수 있겠다.


박정기_효제문자도(孝悌文字圖)_한지에 분채 채색_각 80.3x60.6cm. 2024

박정기는 이번 스페이스 테미의 2인전에 행서체(行書體)로 쓴/그린 ‘효제충신 예의염치(孝悌忠信 禮儀廉恥)’에 현대적 그림을 접목한 현대판 문자도를 선보인다. 조선시대 ‘효제문자도(孝悌文字圖)’는 군자가 행해야 할 행동지침인 8가지 덕목을 가리키는 글자에 이와 관련된 고사나 설화의 내용을 그린 문자도를 뜻한다. 그런데 박정기의 ‘현대판 효제문자도’에는 글자와 전혀 관련 없는 이미지들을 그린 문자도란 점이다.

박정기는 <효(孝)>에 마치 우주 같은 이미지를, <제(悌)>에 외발자전거를 타는 기린을, <충(忠)>에 용과 유니콘(unicorn)이 서로 장기를 두는 장면을, <신(信)>에 수많은 이들이 빠친코에 빠진 모습을, <예(禮)>에 로봇과 나비의 만남을, <의(義)>에 붉은 버섯 위에 올라탄 유니콘을, <염(廉)>에 모자 쓴 물고기가 하늘을 나는 풍경을, <치(恥)>에 기하학적인 그림을 그려놓았다.


왼쪽) 박정기_예(禮)_한지에 분채 채색_80.3x60.6cm. 2024
오른쪽) 박정기_의(義)_한지에 분채 채색_80.3x60.6cm. 2024


왼쪽) 박정기_염(廉)_한지에 분채 채색_80.3x60.6cm. 2024
오른쪽) 박정기_치(恥)_한지에 분채 채색_80.3x60.6cm. 2024

하지만 여덟 자에 그려놓은 그림들은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림들이란 점이다. 머시라? 그것은 박정기 작가가 직접 창조해서 그린 그림이기 때문이라고요? 아니다! 그것은 박정기가 직접 창안해서 그린 그림이 아니다. 그는 “마이크로 소프트사의 코파일럿(Copilot)에 ‘무작위로 이미지 생성해줘’라는 검색어”를 썼다면서, 그가 차용한 그림들은 “AI가 생성한 그림들”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박정기가 차용한 그림들은 작가도 없고 저작권도 따로 없다.

이런 단편적인 정보는 박정기의 현대판 ‘효제문자도(孝悌文字圖)’가 더 이상 설명하고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각적으로 묘사한 그림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따라서 그의 현대판 문자도는 (까뮈의 목소리를 빌려 말하자면) 무궁무진한 세계가 그칠 줄 모르고 우리를 부르는 것이다. 이를테면 그는 (그림을) ‘그리고’ (접속부사) ‘그리고’ (그림을) ‘그리고’를 지속할 수 있다고 말이다. 물론 그는 현대판 문자도가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의 작품은 일종의 ‘부조리한 작품’이 아닌가?

스마트폰만 있다면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도수진 & 박정기 ‘전자-도록(digital-catalogue)’

출판사 KAR에서 발행한 도수진 작가의 전자도록 『세 개의 방』과 박정기 작가의 전자도록 『창작의 열쇠』는 온라인 서점들(예스24, 교보문고, 알라딘, 밀리의 서재)에서 구매 가능합니다. 전자도록에는 작가들의 전작들이 망라되어 있고 미술평론가 류병학 씨의 작가론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왼쪽) 세 개의 방 / 저자: 도수진 류병학 / 출판사: 케이에이알(KAR)
오른쪽) 창작의 열쇠 / 저자: 박정기 류병학 / 출판사: 케이에이알(K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