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과 밖

김해민 & 정석희

2024.09.21~10.26

작가와의 대화_2024.09.21(토) pm 15:00

Gallery R
오픈 : 매주 화요일-토요일 오후 1시부터 7시까지
휴관 : 매주 일요일, 월요일

김해민 작가는 일명 ‘비디오 아트의 아버지’로 불리는 백남준의 계보를 잇는 대한민국 미디어아트의 1세대 아티스트이다. 그는 1980년대 말부터 현재까지 35년에 걸쳐 미술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남북의 분단문제 또한 종교의 문제 등 다양한 주제로 작품을 제작해 오고 있다.

김해민은 1994년 미건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개최한다. 당시 그의 ‘tv 망치(tv hammer)’(1992)는 미술계에 충격을 주어 주목받는다. 1996년 일본 동경(VA nisiogi)에서 열린 개인전(Video as the Mudang), 1998년 금호미술관의 개인전(Same kind and Defferent kinds), 2003년 일민미술관의 개인전(직립희롱), 2016년 아라리오 뮤지엄의 개인전(smash!) 등 10여 차례의 개인전을 개최한바 있다. 김해민은 국내외의 다양한 그룹전에 초대받았다. 그가 참여한 해외 그룹전과 국제전만 표기한다면 다음과 같다.

1990년 일본 동경 도끼아자 극장의 『‘90 한일 행위 예술제』, 1991년 공주 문예회관의 『금강에서의 국제 자연 미술제』, 일본 타지마의 ‘CAMP IN TAJIMA’ 심포지움, 일본 Q화랑의 『‘NAN - DONG’ 비디오 설치전』, 워커힐미술관의 『서울 국제 퍼포먼스 페스티발』, 1992년 독일 슈베르그의 ‘히어 운트 다’ 자연미술 심포지움, 겔센키르헨의 ‘가이아’ 국제미술 심포지움, 1993년 독일 에션의 ‘FILM FOR ART’ Video festival, 일본 후쿠이 fine art 미술관의 제5회 ‘후쿠이’ 국제 비디오 비엔날레, 1994년 일본 동경의 1회 IZUMIWAKU Project, 1995년 일본 메이호의 ‘Meiho’ Art Symposium, 1996년 일본 동경 CASA화랑의 『The Self and The Other』, 일본 동경(izumiwaku)의 『‘2th IZUMIWAKU Project』, 1997년 광주시립미술관의 ‘제2회 광주 비엔날레’ 특별전 『삶의 경계』.

2000년 서울 국제미디어비엔날레 『Media City In Seoul : 지하철 프로젝트』, 일본 동경(Japan Foundation Forum)의 『Multimedia Installation in Asia』, 2001년 호주(Brisbane Powerhouse)의 ‘Excess’ Multimedia Art Asia Pacific, 미국 로스엔젤레스(ICAF)의 『Korean Contemporary Art Show』, 2002년 독일 일본문화원의 『Serendipity’ Multimedia art』, 일본 나고야(Aichi Art Center)의 『Contemporary Korean Film Festival 2002』, 대전시립미술관의 『Media Art Daejeon - NewYork : Special Effects』, 2006년 부산비엔날레 바다미술제, 2007년 중국 상해현대미술관의 『'Animamix' 비엔날레』, 미국 뉴욕(Dumbo)의 『'Video Dumbo' 11th Video Art Festival』, 대한민국 서울(코리아나미술관) & 중국 상해(Bund18 Creative Center)의 『'역의 정점' 국제전』.

2008년 쿠바 하바나(Fundacion Ludwig de)의 『Los Puntos del Compas』, 폴란드(galeria U JEZUITOW ul)의 『Counterpoint』, 2009년 독일 프랑크프르트(Evangelische Stadtakademie)의 『Grenzland』, 2010년 인천국제디지털아트페스티벌, 2011년 이화여자대학교 『EMAP 풍경술 : 국제 미디어아트』, 2013년 주안 국제 미디어 페스티벌, 2014년 스페인 마드리드(IVAHM)의 『International Video Art House Madrid』, 2015년 이탈리아 로마 국립21세기 현대미술관 『The future is now』, 2018년 프랑스 니스(OVNi in Hotel)의 ’Ovni’ Video Festival 2018.

김해민은 1992년 독일 셀크 쿤스틀러하우스(Selk Kunstlerhaus), 2000년부터 2001년까지 삼성미술관 지원 ‘운니 아틀리에’ 레지던시에 입주해 작업했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대전시립미술관, 경기도미술관, 대구미술관, 제주도립미술관, 일민미술관, 아트센터 나비, 아라리오미술관, 인터렉티브 미술관과 개인 컬랙터가 소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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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석희 작가는 1992년 한성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1995년 경희대학교 교육대학원 미술교육학과를 졸업한다. 그리고 1999년 뉴욕공대 대학원 커뮤니케이션아트를 졸업하고, 2000년 뉴욕 시각예술학교(School of Visual Arts Continuing Education)을 수료한다.

그는 1991년 한성대학교 교내 우촌미술관에서 첫 개인전을 열고, Rich Art Gallery(뉴욕), Pleiades Gallery(뉴욕), Philosophybox Gallery(뉴욕), Space World Gallery(뉴욕), Space World Gallery(뉴욕), 아트센터 나비, E-LAND SPACE, 영은미술관, OCI 미술관, 인천아트플랫폼, 서울아트센터 도암 갤러리 등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그는 국내외에서 열린 그룹전에 초대되었다. 그의 대표적인 해외 그룹전은 다음과 같다. Gallery 47(런던), Burgh Hause Gallery(런던), St. Lucy Church(저지시티, 미국), Bayonne Public Park(미국), NYIT Gallery(뉴욕), Gallery 193(베이욘, 미국), Period Gallery)오마하, 미국), New Jersey Visual Art Center(썸밑, 미국), Space World Gallery(뉴욕), FGS Gallery(잉글우드, 미국), Viridian Artist Gallery(뉴욕), Pleiades Gallery(뉴욕), White Box Gallery(뉴욕) 등이 그것이다.

그의 대표적인 국내 그룹전은 다음과 같다. 해외청년작가전(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platform in kimusa(옛 기무사, 서울), The Last Wall Begins(아르코 대극장), Digital Furniture(아트센터 나비), 평창스페셜올림픽(알펜시아컨벤션센터), 광주 국제 미디어아트 페스티벌(서울스퀘어미디어아트센터), Intro(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Artist Portfolio(사비나 미술관), 무심(소마드로잉센터), 단편선(인천아트플랫폼), 풍경에서 명상으로(뮤지엄 산), 방랑(제주현대미술관), 삼다도 진경(서귀포 예술의전당), 모호한 경계(성남 큐브미술관) 등이 그것이다.

그는 2000년 미국의 International Juried Show 2000(New Jersey Visual Art Center)에 수상하고, 2004년한용진 미술상(Excellent Video Artis, 뉴욕), 2005년 뉴욕의 AHL Foundation Annual Contemporary Art Competition에서 최우수상(Grand Prize)을 수상, 2015년 천주교서울대교구의 가톨릭미술 ‘서소문 밖의 순교자’ 우수상을 수상, 2019년 천주교서울대교구의 가톨릭미술 ‘품다’ 우수상, 우이동 만남의 광장 공공미술 대상을 수상, 2022년 성동문화재단의 제1회 성동문화재단 미디어아트 대상을 수상한 바 있다.

그의 작품은 서울아트센터 도암갤러리, 성남 큐브미술관, 성동문화재단, 부산 현대미술관, 제주현대미술관, 서울시문화재단 강북구문화재단,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OCI 미술관, 영은미술관, 아트센터 나비, 절두산성당 박물관, 서소문 성지 역사박물관, 아트 포럼 뉴 게이트 갤러리 그리고 개인 컬랙터들이 소장하고 있다.


김해민 & 정석희 2인전 『안과 밖』. 갤러리 R. 2024

안과 밖

갤러리 R의 김해민 & 정석희 2인전 전시타이틀 『안과 밖』은 헤르만 헤세(Hermann Karl Hesse)의 단편소설 『내부와 외부(within and without)』를 차용한 것입니다. 머시라? 헤르만 헤세의 단편소설 『내부와 외부』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해 달라고요?

그것은 논리학을 신봉하는 프리드리히와 친구 에르빈의 대화로 이루어진 단편소설이다. 에르빈은 미신의 영역에 대한 프리드리히의 논박을 지지하지 않아 그들 사이는 한동안 소원(疏遠)해졌다. 오랜 시간이 흘러 프리드리히는 친구 에르빈의 집을 방문한다. 프리드리히는 에르빈의 서재 벽에 걸린 종이를 본다. 그 종이에는 에르빈이 쓴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다.

“어떤 것도 외부에 있지 않고, 어떤 것도 내부에 있지 않다. 왜냐하면 외부에 있는 것이 내부에 있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는 그 텍스트를 ‘신비적 교리’ ‘신비적 직관주의’로 해석한다. 따라서 논리학 신봉자에게 그 텍스트에 동의할 수 없었다. 프리드리히는 에르빈에게 ‘마법사가 되려는 것이냐’고 조소한다. 프리드리히는 에르빈에게 내부와 외부에 관한 금언에 대해 설명해 달라고 한다. 에르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떤 것도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떤 것도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네. 그것의 종교적 의미를 자네는 알고 있지. 하느님은 도처에 계시네. 그분은 정신 속에도 자연 속에도 계시지. 하느님이 삼라만상이시니까 모든 것이 신과 같은 것이야. 전에 우린 이걸 범신론이라고 불렀지. 철학적인 의미는 이런 것이네. 우리의 생각은 외부와 내부를 분리하는 데 익숙하지만, 반드시 그런 건 아니지. 우리의 정신은 사고를 통해 그 한계의 배후인 저 너머로 되돌아갈 수 있네. 우리의 세계를 형성하는 대립된 대상을 초월하여 새로운 인식이 시작되는 것이지.”

하지만 프리드리히는 에르빈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결별에 이른다. 에르빈은 프리드리히에게 작은 점토 인물상 하나를 작별 선물로 준다. 프리드리히는 그 인물상을 싫어했지만 버리지 않고 집으로 돌아와 다른 장난감 같은 기념품들 사이에 놓아둔다.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프리드리히는 짧은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에르빈이 작별 선물로 준 인물상이 보이지 않았다. 알고 보니 하녀가 청소하다가 깨트려 버린 것이다. 프리드리히는 처음에 잘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이내 그 인물상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다. 이를테면 인물상이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프리드리히의 내부에 있다고 말이다. 프리드리히는 한밤중에 에르빈의 집으로 달려간다. 프리드리히는 에르빈에게 어떻게 하면 인물상이 자신에게서 떠날 수 있을지 말해달라고 한다. 에르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네는 힘든 발걸음을 내디딘 것 같네. 자네는 외면이 내면에 있을 수 있음을 체험했어. 대립된 대상을 초월한 것이지. 그것이 자네에게는 지옥처럼 보였지만, 그것이 천국인 셈이지. 자네 앞에 놓여 있었던 천국 말이지. 이것이 마법이지. 자네에게 일어났던 것처럼 외부와 내부가 고통을 받으면 강요에 의해 바뀌게 되지. 과거를 불러들이고 미래도 불러들여 보게. 둘 다 자네 안에 있게 되지! 자네는 오늘까지 자네 마음의 노예였어. 그것의 주인이 되려 해보게. 그것이 마법이네.”

김해민의 ‘접촉 불량’

김해민 작가는 이번 갤러리 R 2인전 『안과 밖』에 <접촉 불량>(2006)과 <반색 난색>(2022) 그리고 R.G.B 칵테일 - 입을 맞춰봐(2024)와 <컬러패턴 시그널>(2024)을 선보인다. 국내 미술계에 잘 알려진 그의 <접촉 불량>은 수동식 TV를 통한 영상작품이다. TV 모니터에 또 다른 수동식 TV가 등장하고, 그 TV 옆에 갑자기 한 남자가 등장하여 수동식 전원을 켠다.


김해민_접촉 불량(Unorderable connections)_Single channel video (6min), TV. 2006

하지만 TV 화면이 제대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 남자는 TV 뒤로 가서 안테나 상태를 점검한다. 곧 화면이 나타난다. 화면은 지하철 풍경인데 한 여성이 서 있다. 그러나 곧 화면이 다시 꺼진다. 남자는 TV가 접촉 불량이라고 판단했는지 TV 모니터를 손으로 ‘탁!’ 치니 다시 화면이 나타난다.

그런데 TV 화면은 이내 전파방해를 받는다. 남자가 다시 TV 모니터를 ‘탁!’ 치니 화면 안의 여자가 마치 머리를 맞은 것처럼 고개를 뒤로 젖히면서 TV 화면 밖을 쳐다본다. 화면 밖의 관객 역시 TV 모니터 속의 여자처럼 깜짝 놀란다. 왜냐하면 관객은 화면 안과 밖을 현실로 착각했기 때문이다.

TV 화면의 남자가 다시 TV 모니터를 잡고 앞으로 기울였다가 원위치시키면 ‘탁!’ 소리와 함께 화면에 알몸 여자의 하체가 등장한다. 알몸의 여자 하체는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돈다. 남자가 다시 TV 모니터를 잡고 서서히 위로 들면 하체만 보였던 알몸의 여자 상체가 차츰 등장한다. 남자가 다시 TV 모니터를 들어 올린다. 하지만 이번엔 여자가 TV 모니터를 들어 올리는 만큼 알몸의 형태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래서 남자는 TV 모니터를 잡고 들었다가 바닥에 ‘탁!’하고 내려놓으니 알몸의 여자가 TV 모니터 화면 밑으로 떨어져 버린다.

이런 단편적인 정보는 김해민의 <접촉 불량>이 실재와 허구를 절묘하게 접목시킨 작품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물론 그의 <접촉 불량>은 전쟁과 정치 그리고 종교와 포르노까지 다룬다. 그런데 그는 정치 사회적인 문제들을 영화와 기록영상 등을 절묘하게 교차 편집시킨다. 이를테면 미국 서부의 사나이들이 총을 들고 나타나면, 다음 장면은 일제강점기 시대의 조선인들이 구 손을 들고 나타난다고 말이다.

관객은 김해민의 <접촉불량>을 보면서 깜짝 놀라고 호기심을 갖게 되며 마지막에 웃음을 터뜨린다. 와이? 우선 그의 작품은 가상으로 현실에 관여한다. 말하자면 관객은 가상을 현실로 착각하게 된다고 말이다. 하지만 관객은 이내 그것이 자신의 착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에 웃는다. 따라서 김해민의 <접촉불량>은 매체에 대한 탁월한 분석력을 관통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김해민의 ‘RGB 칵테일 - 입을 맞춰봐’

김해민의 ‘RGB 칵테일 - 입을 맞춰봐’는 그의 ‘RGB 칵테일’(2001)과 ‘R.G.B 칵테일 - 용해되지 않는 캡슐’(2017)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나는 이곳에서 그의 신작 ‘RGB 칵테일 - 입을 맞춰봐’만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겠다.

그것은 두 개의 칵테일 잔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미디어설치’ 작품이다. 하나는 실제 유리잔 위에 영상을 투사하여 칵테일 잔에 물이 차 있는 듯이 보이는 입체적인 칵테일 잔이다. 다른 하나는 모니터 속에서 보이는 같은 크기의 칵테일 잔 영상이다. 전자가 삼차원 공간에 놓여 있는 실제 칵테일 잔이라면, 후자는 이차원 공간인 모니터 속 이미지 영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김해민_RGB 칵테일 - 입을 맞춰봐_미디어 설치(칵테일 잔, 빔프로젝트, 모니터, 노트북). 2024

우선 각각의 칵테일 잔 안에 블루(B)와 레드(R)의 술이 담긴다. 그런데 그 칵테일 잔에 담긴 술(?) 밑에서부터 기포들이 위로 떠오르는 것이 아닌가. 잠시 후 칵테일 잔의 컬러가 바뀐다. 이를테면 블루에서 레드로 그리고 그린으로 전이된다고 말이다. 오잉? 이건 무슨 일인가? 술이 담긴 칵테일 잔에 입술이 둥둥 떠다니는 것이 아닌가.

머시라? 모니터에서 보여주는 칵테일 영상은 알겠는데 실제 칵테일 잔 안에서 벌어지는 상황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모르겠다고요? 그것은 물리적인 칵테일 잔 위에 빔프로젝트를 설치하여 영상을 칵테일 잔 안으로 투사한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실제 칵테일 잔을 스크린 삼아 평면적인 영상을 입체적으로 전이시킨 셈이다.

뭬야? 어떻게 영상이 칵테일 잔에 투사될 수 있느냐고요? 네? 혹시 영상이 투사된 칵테일 잔 안에 어떤 액체를 넣었느냐고요? 만약 당신이 칵테일 잔을 관찰한다면, 그것은 빈 잔이라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상이 투사된 부분, 그러니까 잔 안쪽 면을 세심히 본다면, 그곳에 에칭(간 유리) 처리한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둥근 잔 속의 영상이 서로 간섭하면서 입체적 효과를 드러내는 것이다. 머시라? 실제 칵테일 잔에 떠다니는 입술과 모니터에 나타난 칵테일 잔에 떠다니는 입술이 마치 서로 말을 주고받는 것처럼 보인다고요? 김해민의 육성을 직접 들어보자.

“영상에 나오는 입술 모양의 이미지는 대면한 다른 잔의 입술을 향해 무언가를 계속 말하고 있지만 접점을 찾지 못한다. 왜냐하면 계속 입을 맞추려 노력하지만 서로의 구조적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슷한 형체로 인식되는 칵테일 잔에 투사된 움직이는 입술 이미지를 통해 서로 소통할 수도 있을 것이다.”

김해민의 ‘반색 난색(伴色 難色)’

김해민의 <반색 난색(伴色 難色)>은 그의 <자화상(Self-Portrait)>(1995)과 <부조리한 알리바이>(1999) 그리고 <3개의 빛(Three lights)>(2008)과 <타화상(Others Portrait)>(2014) 또한 <빨강 그림자 파랑 그림자>(2014)와 <두 개의 그림자>(2017)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겠다. 나는 이곳에서 그의 신작 <반색 난색>만 간략하게나마 살펴보도록 하겠다.

그것은 2채널 미디어 설치작품이다. 김해민은 벽면에 2개의 모니터와 각각의 모니터 위에 실제 전구를 각각 설치한다. 두 대의 모니터가 동시에 켜지면 두 명의 여인이 등장한다. 한 여자는 정장을 입고 있고, 다른 여자는 한복(광목으로 제작한 일종의 ‘스님 옷’)을 입고 있다.

모니터 위에 설치된 2개의 전구에서 하나가 켜지면, 그 켜진 전구 밑의 정장 입은 여성은 마치 조명을 밝은 것처럼 밝게 나온다. 반면에 전구에 불이 켜지지 않은 모니터의 한복을 입은 여성은 마치 조명을 받지 못한 것처럼 어둡게 드러난다. 이를테면 전구가 들어온 모니터의 여자는 조명을 직접 받아 밝은 표정을 하는 반면, 전구가 꺼진 모니터 여자는 조명을 간접적으로 받아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다고 말이다.


김해민_반색 난색(伴色 難色)_2채널 비디오, 미디어 설치(모니터 2대, 컨트롤러, 전구 2개). 2022

실제 전구가 점멸하면 인물들도 스크린에서 사라진다. 그리고 이전과 달리 다른 전구에 불이 켜지고, 그 켜진 전구 밑의 한복 입은 여성은 조명을 받아 밝은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꺼진 전구 밑의 모니터에 등장한 정장 입은 여성은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말하자면 전구가 켜진 밑의 모니터 속 여자는 조명을 직접 받아 반색(伴色)하는 반면, 전구가 꺼진 밑의 모니터 속 여자는 난색(難色)을 표한다고 말이다.

김해민의 <반색 난색>은 제목 그대로 스크린이 등장하는 인물들이 반색과 난색을 반복한다. 물론 작가는 인물들의 반색과 난색을 마치 조명의 여부에 따라 나타나는 것처럼 조작해 놓았다. 그런데 만약 당신이 등장인물들을 세심히 관찰한다면. 그들이 한결같이 동일인물이라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를테면 한 여자가 각기 다른 의상만 갈아입고 출현했을 뿐이라고 말이다. 그 점에 관해 김해민은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반색 난색>은 “한국 문화의 근간을 이루는 유불선(儒佛仙) 사상을 각각 중요한 문화 주체로 설정하여 작업한 것이다. 배우는 유불선 각 사상을 대표하는 복장을 착용하고 전구의 불빛과 상호 작용을 하며 작품의 주제를 풀어낸다. 이 작품은 외부에 설치된 조명의 점멸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나누어지는 중심과 변방의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이며 수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 갈등하는 현대인의 지금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김해민은 <반색 난색>에서 유불선의 의상을 입은 같은 인물을 등장시켜 삼교합일을 암시한 것이 아닐까? 그러면 반색(伴色)과 난색(難色)은 색(色)의 ‘한시적 노출’이 아닌가? 말하자면 반색과 난색은 색(色)의 놀이를 통해 한시적으로 나타나는 노출이라고 말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필자의 해석에 반색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난색을 표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김해민의 ‘컬러패턴 시그널’

김해민의 <컬러패턴 시그널>은 <7개의 컬러 패턴 시그널>(1995)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겠다. 1995년 김해민은 일본 ‘메이호’ 아트 심포지움(‘Meiho’ Art Symposium)과 부산 해운대에서 개최된 바다국제미술제에 <7개의 컬러 패턴 시그널>을 전시한다. 그것은 제목 그대로 ‘7개의 컬러 패턴 시그널’을 해운대 모래사장에 설치한 것이다.


7개의 컬러 패턴 시그널(7 Signals)_Installation, dimensions variable_Haeundae, Busan. 1995

머시라? 기하학적인 무늬인 ‘컬러 패턴 시그널’이 무엇이냐고요? 뭬야? 그것은 TV 화면조정시간(畵面調整時間)의 ‘컬러 바(color bar)’로 보인다고요? 네? 그것은 ‘SMPTE 컬러 바(SMPTE color bars)’ 같다고요? 맞다! 그것은 TV 화면조정시간의 ‘SMPTE 컬러 바’를 마치 길거리의 간판처럼 백사장에 설치한 것이다.

머시라? TV 화면조정시간의 ‘SMPTE 컬러 바’가 무엇이냐고요? ‘TV 화면조정시간’은 문자 그대로 TV 방송을 시작하기 전 수상기에 수신되는 전파의 화면이나 음성의 수신상태를 점검하기 위한 시간을 뜻한다. 1960년대 생인 필자는 어린 시절 오후 TV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면서 컬러 바를 멍하게 바라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1990년대 중후반 케이블TV가 보급되면서 지상파 TV 어린이프로그램의 시청률이 차츰 떨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2005년 평일 낮에 TV 정규방송을 시작하면서 오전 방송과 오후 방송의 구분이 사라졌다. 또한 2010년대 이후 TV는 24시간 방송으로 전환되어 컬러 바를 보기 힘들어졌다.

‘컬러 바’는 보통 7가지 색깔로 구성된다. 시청자는 이 컬러 바의 색상이 선명하게 보이도록 색상을 조정해야 한다. 그러나 시청자가 컬러 바의 정확한 색상을 구분하는 것은 적잖이 어려운 작업이다. 따라서 흔히 TV 전문가들은 일반적으로 흰색을 가장 희게 만드는 방법으로 화면을 조정하면 된다고 말한다.

TV 화면은 빨강(Red)과 초록(Green) 그리고 파랑(Blue)을 기준으로 색을 표시한다. 이 세 가지 색깔이 바로 ‘빛의 삼원색’이다. 삼원색의 영어 머리글자를 따서 흔히 ‘RGB 컬러’라고 부른다. 원색(原色)은 독립적인 색을 말한다. 이를테면 삼원색은 서로 독립적인 색으로 둘을 혼합해도 남는 셋째의 색을 만들 수 없다고 말이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원색(原色)은 비율을 달리하여 섞으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색을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RGB 컬러’는 가산혼합의 3원색이라고 부른다. 3원색을 똑같은 비율로 섞으면 바로 TV 화면조정시간에 보던 일곱 가지 무지개색이 만들어진다. 그것을 ‘테스트 패턴(test pattern)’이라고 부른다.

머시라? ‘테스트 패턴’은 화면 한가운데 원형에 7가지 색깔을 디자인한 것을 뜻한다고요? 맞다! 와이? 왜 원형 안에 7가지 색을 넣느냐고요? 왜냐하면 원형 안에 7가지 색을 넣으면 화면을 좀더 평면에 가깝게 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브라운관’이라고 부르던 구형 TV나 구형 컴퓨터 모니터는 화면이 평면이 아니라 가운데가 볼록하게 튀어나온 모양이었다.

그런데 볼록 화면에서는 ‘기하학적 왜곡(geometric distortion)’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화면 한가운데 원형을 넣어 선의 왜곡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화면을 조정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말하자면 테스트 패턴은 단지 색깔뿐만 아니라 모양도 조정할 수 있도록 마련한 장치라고 말이다.

김해민의 <7개의 컬러 패턴 시그널>은 화면 한가운데 있는 원형이 없는 일곱 가지 색깔로만 작업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컬러 바’는 볼록 화면이 아닌 자연에 설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의 ‘컬러 바’ 뒤에는 광활한 바다와 하늘이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화면조정시간을 갖지 않아도 생생한 자연의 색깔과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김해민_컬러패턴 시그널_컬러프린트 10점. 2024

자, 원점으로 돌아가 보자. 원점? 김해민의 <컬러패턴 시그널> 말이다. 그것은 해운대 모래사장에 설치한 그의 <7개의 컬러 패턴 시그널>에서 하나를 선택하여 사진 위에 10가지 방식으로 디지털 드로잉을 하여 컬러 프린트로 출력한 것이다. 김해민은 <컬러패턴 시그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무런 실체가 없는 TV의 컬러 화면 조정용인 전자 이미지인 ‘컬러패턴 시그널’을 실제 공간에 던져 놓음으로서 실제 공간을 수정할 수 있을까 하는 은유가 내포되어 있다. 디지털로 변환된 사진 위에 작가가 느끼는 드로잉을 첨가해 새롭게 변모시킨 작업이다.”

정석희의 영상드로잉 ‘맨 인 뉴욕’

정석희는 이번 갤러리 R 2인전에 그의 ‘영상드로잉’ 6점과 ‘영상회화’ 8점 그리고 회화 6점을 선보인다. 나는 일단 그의 ‘영상드로잉’을 간략하게나마 살펴본 다음 ‘영상회화’와 신작 회화에 대해 언급해 보도록 하겠다. 그의 ‘영상드로잉’ 6점은 다음과 같다.

<맨 인 뉴욕(A Man in New York)>(1999)와 <내부와 외부(Within and Without)>(2001) 그리고 <무제(Untitled)>(2010)과 <에피소드>(2014) 또한 <지리멸렬>(2022)과 <안과 밖>(2019)이 그것이다. 나는 이곳에서 ‘영상드로잉’과 ‘영상회화’의 ‘신호탄’으로 알려진 뉴욕 시대의 작품 <맨 인 뉴욕>만 언급해 보도록 하겠다.


정석희_a Man in New York_영상드로잉, 3분, 1채널 비디오, 가변크기, 1999

정석희는 1999년 뉴욕공대 대학원에서 커뮤니케이션 아트과를 졸업한다. 당시 그는 졸업전시에 독특한 ‘영상드로잉’을 선보인다. 그의 <맨 인 뉴욕>이 그것이다. 커뮤니케이션 아트과 졸업생들은 대부분 단편영화를 전시하는데, 그는 런닝타임 3분짜리 영상드로잉을 출품한다. 그는 어느 인터뷰에서 졸업전시에 ‘영상드로잉’ 작품을 하게 된 동기를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당시 저는 대학원에서 영화, TV 제작과 관련된 공부를 하였습니다. 대학원 수업의 기술적인 면을 저의 드로잉 작업에 결합시켜 제작해 보았던 것이죠.”

영상은 타이틀(A Man in New York)’과 함께 연출(Directed) 정석희(Seok-Hee Jung)가 나온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텍스트가 키보드 자판기를 타이핑 하듯 쓰여진다. “이 모든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정신에 자유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Even after all these years, there are traces of my freedom in spirit.)”

첫 화면은 미국 뉴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외벽에 철제 비상계단이 있는 고층건물을 보여준다. 장면은 작은 창문이 열려있는 실내 풍경으로 바뀐다. 실내에는 침대 하나와 전등이 전부이다. 하얀 시트 침대 위에는 마치 알 같은 것이 있다. 그 알 같은 것이 꿈틀거리더니 몸을 마치 달팽이처럼 웅크리고 있는 민머리 사내로 변신한다. 이를테면 사내가 마치 알에서 태어난 것처럼 말이다. 민머리 사내는 맨발에 반바지에 가로줄 무늬가 있는 셔츠를 입고 있다. 그는 침대에서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창가로 걸어간다.

화면은 바뀌어 창가에 기대어 있는 사내를 보여준다. 사내는 비 내리는 하늘과 자동차 소리가 들리는 길거리를 바라본 다음 몸을 돌린다. 화면은 다시 실내로 바뀌어 사내가 의자와 탁자를 지나 화장실로 걸어간다. 따라서 사내의 원룸에는 침대와 조명뿐만 아니라 의자와 탁자 그리고 화장실이 있는 셈이다. 사내는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와 소변을 보고 세수를 한다.

사내는 원룸에서 나와 계단을 내려가 건물 밖으로 나간다. 장면은 빗소리와 자동차 경적과 함께 대도시의 건물들을 보여준다. 사내는 대도시의 거리를 배회한다. 그는 지하철 계단을 따라 내려가 지하철에 승차한다. 장면은 하늘에서 바라보는 시점으로 건물들 사이로 나 있는 골목들로 전환한다. 물론 빗줄기 소리는 계속 들린다. 사내는 1212호 문을 열고 계단을 따라 올라가 다시 원룸으로 돌아와 침대 위에 누운다. 그는 몸을 구부려 영상 초기에 보았던 알 모양으로 변신한다.

장면은 알이 부화(孵化)하듯 사내로 변신한다. 하지만 이번 사내의 양팔은 날개로 전이되어 있다. 카메라는 사내를 밑에서 포착한다. 날개를 지닌 사내는 뻥 둘린 실내 천장을 바라본다. 그는 양 날개를 펼쳐 날갯짓해 하늘로 날아간다. 그는 하늘 속으로 사라진다.

정석희 감독의 ‘드로잉 애니메이션(Drawing Animation)’은 문자 그대로 종이에 혼합재료로 ‘드로잉들로 움직이는 영상을 제작’한 것이다. 그는 그것을 ‘영상드로잉’으로 명명한다. 그의 드로잉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배경이고, 다른 하나는 움직이는 인물이다. 정석희는 배경 드로잉 위에 인물 드로잉을 연출해 카메라로 촬영한다. 말하자면 그는 종이에 드로잉한 이미지들을 잘라 일종의 ‘컷’을 만들어 배경 드로잉에 연출했다고 말이다.

그런데 그가 배경 위의 인물을 움직이도록 만들기 위해서 적잖은 인물 드로잉 ‘컷’ 작업을 했다는 것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이를테면 그는 인물의 움직이는 동작을 일일이 종이에 그려서 오려내어 배경 위에 연출해 카메라로 촬영했다고 말이다. 인물이 한 동작을 하기 위해 몇 장의 드로잉이 필요할지를 생각해 보시라. 그는 한 마디로 ‘드로잉-노동’ 작업을 한 셈이다.

덧붙여 정 감독의 <맨 인 뉴욕>에서 움직이는 것은 민머리 사내뿐만 아니라 지하철 정류장으로 달려오는 지하철도 있다. 그런데 그들은 한결같이 그림자를 지닌다. 정 감독은 배경 이미지 위에 컷 캐릭터를 연출할 때 배경으로부터 일정 간격을 두었을 것이다. 와이? 그가 캐릭터에 그림자를 만들어주기 위해서다. 움직이는 캐릭터에 그림자를 첨가한다는 것은 일종의 ‘호흡’을 불어 넣어주는 셈이다.

정석희 감독의 ‘영상드로잉’ <맨 인 뉴욕>은 다양한 사운드도 사용되었다. 빗소리, 자동차 소리, 걸어가는 소리, 문 여는 소리, 변기 물내리는 소리, 계단 내려가는 소리, 바닥에 동전이 떨어지는 소리, 지하철 소리, 지하철 문 열고 닫히는 소리, 날개를 펴고 하늘로 날아가는 소리가 그것이다. 도대체 그 사운드들은 어떻게 녹음한 것일까? 그의 육성을 직접 들어보자.

“당시 저는 작은 캠코더 1대가 있었습니다. 저는 캠코더로 비가 올 때를 기다려 빗소리를 녹음하였고, 자동차 소리는 뉴욕 시내에서 직접 녹음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걷는 소리나 문 여는 소리 그리고 변기 물 내리는 소리와 계단 내려가는 소리는 작업실 안에서 모두 직접 녹음한 것입니다. 작업실 바닥이 나무 바닥이어서 비교적 쉽게 소리를 녹음할 수 있었습니다. 동전 떨어지는 소리는 길거리에서 바닥에 직접 동전을 던져서 녹음하였고, 지하철 소리는 뉴욕 지하철에서 직접 녹음 한 것입니다. 날개가 퍼덕이는 소리는 후배에게 외투를 펄럭이게 (여러 번 시도함) 하여 녹음한 것입니다.”

영화적 상상력을 드로잉으로 표현한 정석희의 <맨 인 뉴욕>은 뉴욕에 사는 한 사내의 고독한 일상을 ‘영상드로잉’으로 제작한 것이다. 알에서 깨어난 사내는 마치 감옥 같은 집에서 벗어나 뉴욕거리를 배회하다가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 다시 알로 돌아간다. 물론 사내는 영상 말미에서 날개를 얻어 하늘로 비상한다. 문득 영상 초기에 등장한 텍스트가 떠오른다.

“이 모든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정신에 자유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정석희의 영상 병치 ‘문(The Gate)’

정석희는 ‘영상드로잉’ 작업을 한 후 일명 ‘영상 병치’ 작업으로 확장한다. 그의 ‘영상 병치’ 작품은 ‘영상드로잉’과 ‘영상회화’로 확장하는데 일종의 가교역할을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이번 갤러리 R의 전시에는 전시되지 못했지만, 그의 영상 병치 작품인 <문(The Gate)>(2004)에 대해서 이곳에 언급해 보도록 하겠다.

미주 한국일보 2005년 5월 4일자 김진혜 기자의 <서양화가 정석희 씨 ‘알재단’ 미술 공모전 1등>이라는 기사는 ”뉴욕에서 활동하는 서양화가 정석희 씨가 비영리 한인 예술단체 ‘알재단’(회장 이숙녀) 주최 제2회 현대 미술 공모전에서 1등을 차지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다음과 같이 정 씨의 출품들에 대해 언급한다.

“정 씨는 재능 있는 작가 발굴을 목적으로 지난해에 이어 올해 알재단이 개최한 현대미술공모전에서 애니메이션과 영상이 합쳐진 ‘문’(The Gate)과 드로잉 작업과 영상을 배합한 ‘섬’(Island)이란 제목의 비디오 작품 2점을 출품, 영예의 1등을 수상하게 됐다. 작가는 ‘문’을 통해 존재의 문으로 들어가려는 시도를 보여주고, ‘섬’에서는 귀소본능과 현실 상황에 처한 작가 자신의 문제를 탐구하고 있다.”


정석희_The Gate_영상 병치, 목탄지에 사진을 복사, 그 위에 목탄 드로잉_3분. 2004

그리고 김 기자는 “뉴욕 한국일보가 특별후원한 올해 공모전에는 미술잡지 ‘아트 인 아메리카’의 미술평론가 엘레놀 하트니와 뉴욕 현대 미술관의 바바라 런던 큐레이터, 쿠퍼 유니온 대학의 데니스 아담스 교수가 심사를 맡았다”고 전한다. 뉴욕 현대 미술관의 바바라 런던 큐레이터는 정석희의 영상 병치 작품인 <문(The Gate)>(2004)에 관해 다음과 같은 심사평을 적었다.

The Gate
Babara London (MOMA curator, NY)

In ‘The Gate’, the video sequence presents a hand quietly inscribing the Bible onto pieces pf paper, while the animated drawings allow us to follow a figure from the interior of his home out into a mysterious natural landscape. He moves from a world crowded with evidence of modern technology and conveniences to one which is primal and unpeopled. This converges nicely with the resolutely non-modern method of copying undertaken by the scribe in the video sequence.

바바라 런던이 말했듯이 그의 <문>은 한 화면에 두 개의 영상을 옆으로 나란히 편집한 작품이다. 왼쪽 영상은 목탄지에 사진을 복사하여 그 위에 목탄 드로잉을 한 일종의 ‘영상드로잉’이고, 오른쪽 영상은 종이에 볼펜으로 텍스트를 쓰는 영상이다. 머시라? 종이에 볼펜으로 쓴 텍스트가 궁금하다고요? 만약 당신이 바바라 런던의 심사평을 참조한다면, 그것이 성서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뭬야? 성서 내용이 궁금하다고요? 나도 그것이 궁금해 영상을 두 차례나 보았다. 정석희는 적색 융단 위에 흰색 종이를 놓고 검정 볼펜으로 ”최후의 만찬을 준비하다“라는 제목을 쓰고 그 밑에 마르코복음서 14장 12-16절을 필사(筆寫)한다. 장면이 바뀌어 그는 마가복음서 15장 “십자가에 못 박히시다”를 쓴다. 그리고 그는 루카 23장 37절의 “구원해 보아라”를 필사한다. 마지막 장면은 그가 요한복음서 20장 ”부활하시다“를 필사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끝난다.

나는 그가 성서를 얼마나 필사했는지 모른다. 아마 그는 성서를 모조리 필사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런닝타임 3분의 <문>에 맞게 영상을 짧게 편집했을 것이다. 와이? 왜 그는 성서를 필사한 것일까? 네? 혹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활화하기 위해 필사한 것이 아닐까요?

자, 이번에는 성서를 필사하는 영상과 함께 상영되는 그의 ‘영상드로잉’을 보도록 하자. 그의 <문> 영상드로잉은 지나가면서 중얼거렸듯이 목탄지에 사진을 복사하여 그 위에 목탄 드로잉을 한 것이다. 화면 오른쪽에서 정석희가 종이에 볼펜으로 “최후의 만찬을 준비하다”를 쓰는 영상이 시작할 때, 왼쪽에는 실내 침실 풍경을 상영한다. 침실에는 침대에서부터 거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물들로 가득하다.

알몸의 한 사내가 침대에 걸터앉아 있다. 사내는 침대에서 서서히 일어나 거울 앞으로 다가간다. 그는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두 손을 거울로 가져간다. 장면은 서재 공간으로 전환된다. 책상에는 컴퓨터와 책들 그리고 머그컵 등 다양한 사물들이 놓여 있다. 그리고 벽면에 설치한 선반에도 각종 사물이 즐비하게 놓여 있다.

알몸의 사내는 컴퓨터의 빈 화면을 바라보다가 왼손을 뻗어 책상 위에 있는 검정 머그컵을 잡는다. 그리고 사내는 머그컵에 들어있는 커피를 마신다. 장면이 바뀌어 서재의 반대편을 보여준다. 벽면 한쪽에는 TV가 있고, 다른 벽면에는 책들이 있는 선반 그리고 검은 겨울 코트가 걸려있다. 그리고 그 공간과 다른 공간으로 연결된 문이 열려있다. 다른 공간은 바로 침실이다. 알몸의 사내는 컴퓨터 키보드를 누르다가 일어서 이동한다.

장면은 욕조가 있는 화장실을 보여준다. 알몸의 사내는 물을 받은 욕조 안에 들어있다. 그리고 샤워기에서는 물이 뿌려진다. 샤워기의 물은 욕조를 범람해 화장실에 가득 찬다. 장면은 연못에 몸을 담그고 머리만 내민 사내의 모습을 보여준다. 사내는 연못에서 일어나 연못 밖으로 걸어나간다.

그곳은 뉴욕주에 있는 늪지 지역이다. 알몸의 사내는 안개가 자욱한 늪지에서 걸어 나온다. 정면은 사내가 수수밭을 지나 잡초들이 무성한 곳을 걸어간다. 그는 우거진 잡초들을 해치고 바다가로 걸어간다. 그는 갑자기 몸을 던져 바다로 다이빙한다. 그는 망망대해의 수평선을 향해 수영해 간다. 그는 점차 망망대해로 사라진다.

정석희의 <문> 영상드로잉은 바바라 런던이 말했듯이 한 인물이 그의 집 실내로부터 신비스런 자연 풍경 속으로 우리의 흐름을 이끌고 있다. 이를테면 그는 복잡다단한 현대세계로부터 사람이 살지 않는 원시의 공간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말이다.

머시라? 작품 <문>은 성경을 필사하는 영상과 초현실적인 풍경 속에서 여행하는 인물 드로잉을 병치해 현실과 가상의 이중 구조를 나타내고 있다고요? 뭬야? 그것은 종교적 삶을 살고자 성서를 필사하는 인간의 모습과 상상의 공간을 여행하고자 하는 인간의 갈망을 나란히 병치한 작품으로 느껴진다고요? 네? 알몸의 사내가 망망대해를 헤엄칠 때 오른쪽 영상에서 정석희는 “부활하시다”를 열심히 필사하고 있는데, 왜 작가는 그 두 상반된 영상을 병치해 놓았느냐고요?

알몸의 사내가 망망대해를 헤엄치는 것이 일종의 ‘세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고요? 사내가 욕조에 몸을 담갔다가 늪지대 연못에서 일어나는 것이 오히려 ‘세례’를 암시하는 것 같다고요? 사내가 망망대해로 헤엄쳐 나가는 장면은 마치 에르빈이 프리드리히에게 말한 “새로 태어나려는 자는 죽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를 떠오르게 한다고요?

정석희의 영상회화 ‘숲에서 길을 잃다’

정석희는 ‘영상드로잉’으로 시작해 ‘영상 병치’ 그리고 ‘영상회화’ 작품을 한다. 그의 첫 영상회화는 <빛의 변화(The Light Variation)>(2011)이다. 이번 갤러리 R에 선보이는 그의 ‘영상회화’는 다음과 같다. <까마귀와 밥>(2012)과 <폭설>(2018), <십자가의 길(Via Dolorosa)>(2019), <숲에서>(2020), The window(2022), The willow(2023), <겨울, 버드나무>(2024), Just moment(2024) 등이다.

갤러리 R에 전시된 정석희의 ‘영상회화’ 작품들은 전시장을 방문하면 직접 볼 수 있으니, 나는 이곳에서 갤러리 R에 전시되지 않은 그의 영상회화 <숲에서 길을 잃다>를 간략하게나마 언급해 보도록 하겠다. 그것은 거대한 캔버스에 무채색으로 마치 원시림처럼 보이는 풍경을 그린 작품이다. ‘숲에서 길을 잃다’에 주어가 부재하듯 그의 회화 <숲에서 길을 잃다>에도 사람은 부재한다. 도대체 그의 회화와 모니터에 상영하는 ‘영상회화’ <숲에서 길을 잃다>는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정석희_숲에서 길을 잃다_캔버스에 아크릴_200x140cm. 2012


정석희_숲에서 길을 잃다_영상회화, 122점 회화 이미지_캔버스에 아크릴_3분 42초. 2012

나는 궁금한 나머지 3분 42초 동안 그의 ‘영상회화’를 보았다. 울창한 숲에 한 사내가 등장한다. 사내는 숲의 길을 따라 걸어간다. 사내는 이내 숲에서 사라진다. 나는 그의 ‘영상회화’ 마지막 장면을 보고 깨닫게 되었다. 그의 영상회화 <숲에서 길을 잃다>의 마지막 장면은 다름 아닌 그의 회화 <숲에서 길을 잃다>가 아닌가.

이제, 왜 정석희의 회화 <숲에서 길을 잃다>에서 주어가 부재하는지 아시겠죠? 주어는 없는 것이 아니라 그림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이를테면 그의 회화에서 사람은 길을 잃어버린 것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거대한 캔버스에 그려진 그의 회화에는 백여 점이 넘는 그림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정석희는 130호 캔버스에 122점의 그림을 그려놓았다. 물론 121점의 그림은 단 한 점의 그림 밑에 묻혀 있다. 따라서 우리는 단 한 점의 그림만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우리에게 단 한 점의 그림 밑에 묻혀 있는 121점의 그림을 모니터 영상으로 보여준다. 이를테면 121점의 그림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단 한 점의 그림 밑에 묻혀 있다고 말이다.

나는 정석희의 <숲에서 길을 잃다>를 보고 감탄했다. 그리고 나는 궁금했다. 어떻게 그의 ‘영상회화’는 탄생하게 되었을까? 122점으로 이루어진 그의 <숲에서 길을 잃다> 중에 눈부시게 아름다운 그림들도 적잖은데, 그가 그 그림들을 또 다른 그림을 그리기 위해 묵묵히 덮어 그릴 때 심정은 어떠했을까?

나는 그의 <숲에서 길을 잃다>를 보고 문득 ‘퇴적암(堆積岩)’을 떠올렸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퇴적암에는 방대한 역사의 시간과 흔적이 차곡차곡 쌓여있다. 따라서 우리는 퇴적암을 통해 생성 당시 (화석으로 보존되어 있는) 생물이나, 퇴적 당시 기후와 주변 환경에 대해 추측해 지구의 역사를 해석한다.

정석희의 ‘영상회화’는 회화이면서 동시에 회화가 아니다. 그것은 회화와 비(非)회화 사이를 왕복한다. 그렇다면 그의 ‘영상회화’는 기존 회화를 확장하는 것이 아닌가? 그의 ‘영상회화’는 회화를 통해 회화를 벗어난다. 이를테면 그의 ‘영상회화’는 전통적인 회화의 방식을 관통해 전통적 의미의 회화를 벗어난다고 말이다.

나는 정석희의 ‘영상회화’를 일종의 ‘살아있는 회화(Living Painting)’로 부르고자 한다. 그의 ‘살아있는 회화’는 현재진행형이다. 따라서 나는 그의 ‘살아있는 회화’를 과거분사(past participle)가 아니라 현재분사(present participle)로 읽고자 한다. 이를테면 나는 그의 ‘살아있는 회화’를 위험천만하게도 능동적으로 해석하고자 한다고 말이다. 그는 2020년 작가노트에 그림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텍스트를 써놓았다.

“그림은 하나가 되면, 둘이 안 되고, 둘이 되면, 하나가 안된다. 그러므로 그림은 영원히 되지 않는 것이다. 화가는 그저 무엇이 될 줄 알고 계속 그릴뿐이다. 2020”

정석희의 회화 ‘밤, 버드나무’

이번 갤러리 R에 선보이는 정석희의 회화 <밤, 버드나무> 시리즈는 모두 2024년에 제작한 신작들이다. 총 6점으로 이루어진 그의 <밤, 버드나무> 시리즈는 제목에서 암시하듯 버드나무가 있는 밤 풍경을 그린 일종의 ‘풍경화’이다. 정석희의 ’버드나무‘는 천(川)을 향해 머리를 숙이고 있다. 버드나무의 ‘머리카락’은 물에 닿을까 말까 한다. 그런데 내가 그의 <밤, 버드나무>를 보면 볼수록 신기하게도 버드나무가 살아 꿈틀거리는 느낌이다. 그는 신작 ‘버드나무’ 시리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정석희_밤, 버드나무 I_종이 위 아크릴_74x103cm. 2024
정석희_밤, 버드나무 II_종이 위 혼합재료_74x103cm. 2024

“신작 ’버드나무‘ 시리즈는 기존의 나의 영상회화 작업에서 보였던 서사적 구조를 벗어나 회화로써 ’풍경‘과 ’현상‘으로 접근해 본 것이다. 버드나무의 가지들이 물 위로 향하며 미세한 바람에 흔들리는 그 유연함, 연약해 보이는 가지들이 굳세게 뻗어 눈, 비, 바람 속에서도 그 기상과 형형함을 잃지 않는다. 버드나무 잎들은 얇고 가녀리지만, 나무의 전체를 이루어 초록빛 섬처럼 의연하고 당당한 위풍을 보여준다. 그 자연의 모습은 일상의 시간과 계절 속에서 소소하게 관찰되지만, 불안정한 시대의 정신적 지표로 나를 일깨우고 있다.”

정석희는 3년 전 탄천변이 있는 판교로 이사한다. 그는 매일 반려견과 함께 집 주변에 있는 탄천변을 산책하고 있단다. 그는 탄천변을 산책하면서 스마트폰으로 계절별로 버드나무가 있는 풍경을 찍었단다. 그런데 작년 장마가 한창일 때 반려견과 산책하던 탄천변의 버드나무 한 그루가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홍수로 인해 탄천의 물이 범람해 그 버드나무를 쓸어버린 것이었다. 그는 몇 년간 늘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던 버드나무의 부재를 목격하고 혼란에 빠진다. 그는 사라진 버드나무를 마치 추모하듯 화폭에 담았다.

나는 지나가면서 정석희의 ’버드나무‘가 마치 살아서 꿈틀거리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중얼거렸다. 혹 그것은 물을 향해 고개를 숙인 버드나무의 가지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고 보니 버드나무 가지들은 붓으로 그려진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 그는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 가지들을 그린 것일까? 그의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의 가지들을 인위적이지 않게 그리기 위해 “나뭇가지 끝에 붓을 달아 나뭇가지를 흔들어서 그렸다”서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풍경‘은 나의 작업에서 ’인간‘의 모습과 같이 드러나는 중요한 공간으로 자연의 배경으로서 때로는 사회적이고 역사적 형태로서 그 내용과 형식을 보여준다. 신작 ’버드나무‘ 시리즈를 포함하여 ’들불‘, ’숲에서 길을 잃다‘, ’수상누각‘, ’늪‘, 등 대부분의 작업들이 ’풍경‘이고, 그 안에 인간의 서사가 어우러져 있다. 인간과 자연에 둘러싸여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우리는 하나의 ’풍경‘이고, 또 하나의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나의 작업들은 ’현상으로써의 풍경‘을 그린 것이고, 그것이 나의 의식, 무의식의 경계에서 작용하는 안과 밖의 많은 상황을 담아낸 것이다. 여기에서 ’현상‘의 의미는 자연과 인간에게서 발생하는 다양한 현상들이 인간의 특성과 연관되어 하나의 ’풍경‘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정석희의 회화 <밤, 버드나무> 시리즈는 사라진 버드나무에 대한 작가의 심리적 상황을 표현한 것이란 말인가? 그는 버드나무와 가지들 그리고 잔잔히 흐르는 탄천을 대비시켰다. 하지만 그 경계는 모호하다. 이를테면 그들은 마법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이다. 그러면 그에게 <밤, 버드나무>는 마치 삶과 죽음처럼 대립이 아니라 하나의 ‘덩어리’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 문득 알베르 카뮈(Albert Gamus)의 산문집 『안과 겉(L’envers et L’endroit)』(1937)의 한 문장이 떠오른다.

“삶에 대한 절망 없이 삶에 대한 사랑은 없다.(Il n’y a pas d’amour de vivre sance desespoir de vivre.)”

스마트폰만 있다면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김해민 & 정석희 ‘전자-도록(digital-catalogue)’

출판사 KAR에서 발행한 김해민 작가의 전자도록 『THE SIXTH SENSE MASSAGE』와 정석희 작가의 전자도록 『살아있는 회화 I』는 온라인 서점들(예스24, 교보문고, 알라딘, 밀리의 서재)에서 구매 가능합니다. 전자도록에는 작가들의 전작들이 망라되어 있고 미술평론가 류병학 씨의 작가론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왼) THE SIXTH SENSE MASSAGE
저자 : 김해민 류병학
출판사 : 케이에이알(KAR)

오) 살아있는 회화 I
저자 : 정석희 류병학
출판사 : 케이에이알(K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