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박이소 작가의 '무엇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욕망은 결국 낭비이고 허망한 일이라고 인식한다' 이 말을 작가로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요.
A; 굳이 이 말의 전후 맥락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대체로 그가 말하고자 했던 바는 충분히 짐작되고 나 또한 대체로 이에 공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 그가 말하고자 했던 맥락하고는 상관없이 ‘낭비이고 허망한 일’이라는 부분이 굉장히 거슬리고 거북하다. 이런 소인에 대해 밝힌다면 역설적이게도 나는 지금껏 ‘낭비이고 허망한 일’이라는 지점에서 예술의 출구와 가능성을 봐 왔고 이를 애써 지지해 왔다. ‘낭비이고 허망한 일’이라는 잉여의 지점이야말로 예술이 가장 소중히 해야 할, 예술이 기거하게 될 공간이라고 여긴다.”
이것은 2014년에 있었던 어느 대담에서의 일부분이다. 여기에서 예술을 ‘잉여(나머지, 쓸모 없는 일)’로 본 나의 견해는 일반적으로 예술이 갖는 시대 착오성이나 사회적 현실과 유리된 취약성의 측면에서 볼 때 공격 당할 여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점을 애써 강조한 것은 예술은 여전히 당 시대의 낙후되고 일반화된 통념에 맞서 새로운 감각을 자극하고 촉발시키는 것이어야 한다는 믿음과 확신을 역설적으로 얘기한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이것은 예술 일반에 꼬리 붙은 오래된 통념(창조성, 개성, 표현...)에 대한 거부이고 포기이자 나아가 그에 배제되어 왔던 나머지(잉여)에 대한 것에의 간섭과 관여의 부분에서 예술의 가능성을 본다 함을 뜻한다. 그런 결과로서의 나의 작품들은 대체로 사소하거나 연약하고 빈약해서 초라하고 누추하기조차 하다. 나의 작품들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 머무르는 것이거나 흔히 말하는 대중과의 소통과는 거리가 먼 것들이 대부분이다. 과격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보통 얘기하는 예술의 소통기능을 믿지 않는다. 따라서 작품을 하는데 관객을 그리 고려하지 않을 뿐더러 무의미하기 조차하다. 작품에서 최고의 관객은 나 자신이다.
나는 왜 그런 무모한 일을 자초하는 걸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작품을 새로운 감각이 출현하고 경험되는 사건의 장(field)이나 계기(chance) 또는 나 자신이 어떤 수준에로 뛰어 넘어가는 과정의 부분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들이 아주 소중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왜냐하면 작품을 하는데 그 발상이나 제작과정뿐만 아니라 완결된 작품을 통해서 사후적으로 새로운 무언가가 계속해서 경험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에게 작품을 한다는 것은 여전히 아주 특수하고 각별한 일(work)이 아닐 수 없다.
나는 현 시대에 예술이 필요하고 의미가 있다면 전적으로 그러한 이유에서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러한 일은 반드시 작품을 하는 데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작품에서뿐만 아니라 내가 여타의 일을 행하는 데에 있어서 새로운 감각의 출현을 느끼고 이를 의식하느냐 못하느냐 또는 그것을 의식했다 할지라도 그 생경한 것을 스스로 의미화, 내재화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에 대한 자각이다. 따라서 나는 만약에 그러한 새로운 감각이 출현하고 경험되어 의미 있게 다가오는 무엇인가가 있다면 그 모든 일체의 것들을 의미 있는 예술적 행위, 즉 작품의 품격과 위상을 갖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것이 비록 순간에 불과한 것일지라도......
이와 같이 작품은 매 순간 사건과도 같은 촉발된 감각의 연속 즉 ‘감각의 덩어리’인 것으로 다른 어떤 무엇보다도 이에 깊은 관련을 갖는 것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나는 지금 ‘작품을 한다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기억은 나를 구성하는 전부이자 동시에 해체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