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흑백작업과 수인판화가 수인회화로 바뀌어가는 작업의 두가지 방식을 형성하여 작품을 만들어가고 있다.
두 가지 방식을 병행하여 작업한다는 것은 작가에게 욕심이고 과한 부분이 농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가지 형식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그 형식속에 공통된 내용과 연결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흑백(黑白)
나의 그림화면에서의 白은 黑을 규정한다. 그러나 黑은 白을 규정하는 단어는 아니다. 여기서 黑이라는 단어는 영문의 검정(black)이라는 단어보다 漢字의 아득할 玄과 맞닿아 있다. 검정과 黑은 같지만 다르다. 검정은 회색을 담고 있지 않지만 玄은 무채색의 무한한 공간을 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의 그림에서 일정하게 규정된 화면에 풍부한 상상력을 불어넣는 것 또한 白의 역할이다. 흔히들 餘白, 空白 등등으로 불리우지만 이에 앞서 白은 화면에서 하나의 불변한 존재자로 우뚝 서 있다. 화가는 사물을 그리는데 급급하고, 그 사물에 부여되는 의미를 찾는데 골몰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런 의미들은 이미 白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白은 화면의 구성뿐만이 아니라 표현된 사물의 정신까지 규정하는 것이다. 화면(白)은 나의 전부이자 나를 형성하는 공간이다.
사이 (間)
아득한(玄) 곳에서 에너지가 뿜어져 나와 보이는 것에 기운을 넣어 만물을 움직이게 하는 것을 ‘살아있다’라고 표현한다면, 나의 그림은 보이지 않는 그 원초적 기운(에너지)을 표현한 것이다. 끊임없이 뿜어 나오는 심장의 에너지를 표현하고자 한다. 조형적 과장과 화려한 장식적 장치를 없애고 최소한의 형태로 에너지를 담아, 화면을 비상식적 시각 방법을 선택하여 보는 이에게 새로운 사유의 공간으로 안내하고자 한다.
2024.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