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을 켜면 존재하고 전원을 끄면 사라진다.’
이 말은 전기(電氣) 에너지의 존재 유무가 곧 미디어 아트의 존재 유무가 되는 불가분의 관계를 말한다.. 그래서 on, off되는 미디어 아트는 여타 다른 미술 작업인 그림이나 조각과는 다르게 한시적이고 유한한 속성을 갖는다.
나는 한시적으로 재생되는 영상 이미지들이 실재 공간에서 불변하는 사진 이미지들 혹은 실제 오브제들과 소통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자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전기의 입력과 출력을 조정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들게 되었고 그 장치를 이용하여 실재 공간과 상호 작용하는 미디어 작품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미디어 작품 제작이 한동안 나의 주된 관심 작업이 되었다.
전기 조정 장치를 이용한 작품인 'TV Hammer'(1992) 를 발표한 후 본격적으로 미디어 작업을 하게 된다.
이 작품은 가상의 이미지가 실재 공간으로 전이시키는 이미지의 위상, 즉 가상과 실재의 관계에 대해서 명료하게 드러낸 작품이라 볼 수 있다. 좌대에 놓여진 브라운관 TV모니터 속에 재생된 망치이미지는 화면 밖을 향해 견주다가 브라운관을 내려친다. 브라운관 유리에 조그만 흠집이 나면서 ‘쾅’ 하는 소리와 함께 TV모니터가 덜컹거리며 움직인다. 그런 후 TV모니터 속의 망치 이미지가 화면 밖을 향하여 다시 견주면서 움직이면 관객은 혼돈스러워 한다.
가상의 망치가 실재 위상을 획득하는 순간이다.
평소 음양오행, 샤먼 등 동양의 사유 체계에 관심을 갖고 공부를 하면서 우주 삼라만상의 모든 것들이 연결되어 있고 구조화 되어 있다. 라는 것을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러한 개념들을 나의 미디어 작품 제작에 연결시키고 있다.
미디어 TV매체와 샤머니즘은 진행되는 속성이 많이 닮았다. 방송 전파는 눈에 보이지 않고 냄새도 없고 만질 수도 없지만 존재는 한다. 그 전파를 받아 영상 이미지를 구현하는TV가 바로 무당의 역할을 하는 거라 볼 수 있다. 방송 전파를 무당이 하늘에서 받는 ‘기(氣)’ 라는 것으로 본다면 무당은 이 ‘기(氣)’를 받아들여 현실 상황으로 변화시켜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신도안’(1994)은 샤먼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1980년대 말 쯤 인가 사진 촬영 차 계룡산 신도안에 갔었는데 산길에 양쪽으로 많은 촛불들이 이어져 켜져 있는 무당의 제의(祭儀) 광경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촛불, 재단 등 제의(祭儀)에서 보았던 인상을 미디어로 재구성해서 설치를 했던 작업이 ‘신도안’ 작품이다. 중요한 것은 붓하고 초의 관계이다. 사운드 소리에 반응하는 작업이었는데 촛불은 신과 인간이 소통하고자 할 때 쓰이는 도구로 보았고, 붓은 인간과 인간끼리의 소통할 때 쓰이는 도구이다. 그리고 붓끝과 촛불의 형태 또한 비슷하다. 가야금 명인 황병기 선생의 <밤의 소리>라고 하는 가야금 연주를 음악으로 선택했다. <밤의 소리>를 선택한 것은 마지막 부분에 무당이 신을 받을 때 굿 행사의 최고조가 되는데 그 상황과 어우러지는 격정적인 리듬이 있어서 그 곡을 쓴 것이다.
TV모니터가 설치된 공간 바닥에 스피커를 설치하고 그 스피커 위에다 붓을 세워 꽂아 둔다. 스피커에서 가야금 소리가 날 때 그 소리의 진동으로 꽂아둔 붓이 흔들리고 그 흔들리는 붓끝을 비디오 카메라가 잡아서 그 붓의이미지를 공간에 설치된 여러 대의 모니터로 전송 시킨다. 이렇게 해서 공간을 가득 채운 TV모니터들의 화면 속의 촛불 영상들과 붓 영상들이 가야금 소리와 함께 어우러지면서 보여 지는 작품이다.
현재 한국이 처해 있는 분단 상황이 60년이 넘도록 견고하게 유지되고 있다. 긴 시간 동안의 분단 때문인지 남북문제에서 좋지 않은 상황이 발생해도 나에게는 그다지 심각하게 체감되지 않았고 익숙한 상황으로 까지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던 중 이산가족 상봉을 보면서 분단에 대한 여러 생각들을 하게 되었고 분단 상황을 주제로 하는 미디어 작품 제작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5여 년 전쯤 신상옥 영화감독의 안양 스튜디오에서 감독이 북으로 납치되었던 시절 북에서 만든 영화 '사랑 사랑 내사랑' (뮤지컬 춘향전. 1984)을 보고 남한에서 만들었던 성춘향(1961년 김진규 최은희 주연) 과는 어떤 관계가 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었다. 두 영화는 한국 고전 소설 춘향전을 각본으로 한 영화로 신상옥이라는 영화감독에 의해 남과 북에서 만들어 졌다는 분명한 연결고리는 있었다. 하지만 나는 한국인에게 너무나 익숙한 춘향전 이야기에는 흥미가 없었고 두 영화 사이에 내재하는 <나 역시 의식하던 의식하지 않던 관계될 수밖에 없는> 분단의 문제에 흥미를 느꼈다. 그 중심에는 신상옥, 최은희 부부의 삶의 이야기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언젠가 나는 이 두 개의 영화를 가지고 분단에 관한 이야기를 작업으로 해보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작업하게 된 것이 ‘신춘향’ 이다.
작품 ‘신춘향’은 신상옥 영화감독이 남과 북에서 만들었던 춘향전 영화 두 편을 가지고 만든 비디오 설치 작업이다. 작품 제목을 신상옥 감독의 성을 따서 ‘신춘향’이라고 지었다. 공간 바닥에 3개의 비디오 스크린을 설치한다. 뒤쪽에 보이는 영상은 북한에서 만든 춘향전이고 맨 앞쪽의 영상은 남한에서 만든 춘향전이다. 중간에 보이는 영상은 38선, 혹은 휴전선으로 설정된 스크린이다. 카메라 렌즈의 거리 초점을 맞추는 형식을 이용한 영상작업으로 맨 뒤쪽 초점이 맞은 북한의 이몽룡 영상에서 앞쪽 남한 춘향이 영상으로 초점을 맞출 때 어쩔 수 없이 중간 거리에 있는 스크린에 순간 초점이 맞았다 틀어진다. 그 순간 영상이 나타났다 사라진다.